재계 '국감 포비아'

인사이드 Story - 국감 시작…기업인 증인 200명 육박

안나가자니 여론재판 무섭고 나가자니 정치쇼에 휘둘리고

수입차 CEO 4명이나 호출, 해외선 "뭔일 있나" 문의 빗발
기업들 "예상질문 구하자"…여의도 의원실 문전성시
#1 “안 나갔다가 뭔 일을 당하려고….” 10대그룹에 속하는 A그룹 주력 계열사는 올해 정기국회 국정감사에 최고경영자(CEO)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예년 같으면 해외 사업장 방문 등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출석이 어렵다’는 의견을 국회에 전달했겠지만 올해는 일정을 조정해 출석하기로 했다. A그룹 관계자는 “나가서 의원들 호통치는 걸 듣는 것도 곤욕이지만, 안 나갔다가 여론 재판에 휘말리는 게 더 겁난다”며 “작년 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국감에 불출석했다가 법원까지 가서 벌금을 부과받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2 수입차 업체는 올해 국감을 앞두고 패닉에 빠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CEO가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적이 없는데, 올해는 네 명이나 불려 나갈 상황이어서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브리타 제에거 메르세데스 벤츠코리아 사장, 임준성 한성인베스트먼트 대표, 정재희 한국수입자동차협회 회장(포드코리아 사장) 등이 불공정거래와 관련해 국회 출석을 요구받았다. 수입차협회 관계자는 “국감 증인 출석과 관련해 해외 자동차업체들로부터 ‘한국에 무슨 일 있느냐, 왜 국회가 수입차 CEO들을 대거 부르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고 전했다. 14일 시작하는 국감에 기업인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재계에 ‘국감 포비아(phobia·공포증)’가 확산되고 있다. 기업인 증인 수가 역대 최대에 달하는데다 주요그룹 총수들도 증인에 포함되면서 해당 기업들은 ‘초비상’이다.

○기업인 증인 196명…2년 전보다 2.5배↑13일 정치권과 재계에 따르면 올해 국감에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단체장 포함)은 6개 상임위원회, 총 196명에 달한다. 80명의 기업인을 불렀던 2년 전 국감 때보다 2.5배가량 많고, 작년(164명)보다도 32명이 늘어난 규모다.

재계 총수들도 대거 증인으로 채택됐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에 이어 신동빈 롯데 회장, 이중근 부영 회장, 이석채 KT 회장 등이 국회에 나가야 한다.

2~3개 상임위에 중복 출석해야 할 기업인도 많다. 도성환 홈플러스 대표는 환경노동위원회, 정무위원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불려 나간다. 이중근 회장도 국토교통위 두 차례, 정무위 한 차례 등 총 세 번 출석해야 한다.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 박상범 삼성전자서비스 대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대표 등도 두 번의 출석요구를 받았다. 총수나 CEO가 증인으로 나서게 된 기업들은 그야말로 ‘초비상’이 걸렸다.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의원실에는 지난주 내내 기업 대관(정부·국회 관련 업무) 담당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증인 신청을 한 국회의원실을 찾아가 사전에 ‘소명’을 하고 예상 질의내용을 구하기 위해서다. 국회 관계자는 “매년 국감에 기업인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되는 탓에 의원 보좌관 등을 대관 담당으로 영입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혈연, 지연 등을 따져 증인에서 빼달라는 로비전이 치열하다”고 전했다.

○폭발 직전의 재계

정치권이 기업인을 대거 증인으로 채택하면서 기업들의 불만도 폭증하고 있다. 국감에 계열사 CEO 두 명이 증인으로 나가야 하는 B그룹 관계자는 “회사에서 일해야 할 사람을 불러 놓고 하루 종일 벌 세우듯 기다리게 하는 국회가 정상이냐”고 성토했다. 기업인을 불러 놓고 질문 한 번 하지 않는 국회의 ‘행태’를 꼬집은 것. 이와 관련, 작년 정무위에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26명의 기업인 중 질의를 받은 사람은 1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업인들은 국감장 주변에 계속 대기하다 돌아가야 했다. C그룹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금을 투입한 기업 CEO를 국회로 불러내는 것 외에 입법부가 개별기업 CEO를 오라 가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장용근 홍익대 법대 교수는 “국회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해당 부처를 먼저 국정감사 해야지, 대뜸 기업인을 불러 면박만 주려 한다”며 “그런 국감은 지극히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재후/이태명/배석준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