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벤처 붐

저성장 시대 해법은 결국 벤처뿐
늘어나는 숫자 만큼 수혈도 늘려야

이은정 한국맥널티 대표·여성벤처기업협회장 eunjlee@mcnulty.co.kr
지난주 반가운 소식이 잇달아 전해졌다. 한국 정보통신기술(ICT) 경쟁력이 4년 연속 세계 1위에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청소년의 컴퓨터 활용능력이 1위라는 소식도 들렸다. 물리적 인프라부터 인재 풀까지 세계 IT를 리드해갈 충분한 잠재역량을 확인시켜주는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열정과 실력을 갖춘 청년들이 창업에 나서고 있다. 벤처기업 수는 5년 전보다 2배가량 늘었고 매출 1000억원의 벤처도 2005년과 비교하면 5배 이상 증가했다. 과거의 벤처 붐이 재현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도 이런 시장에 호응해 ‘창조경제’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 과거를 돌아보면 역대 정부 모두 벤처 지원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혁신형 중소기업 ‘이노비즈’라는 용어로, 또는 녹색성장의 한 분야로 정부는 벤처와 청년 창업을 지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성공한 벤처로 떠올릴 만한 사례는 손에 꼽기 힘들다. 훌륭한 인프라와 우수한 인재,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벤처기업을 키워내지 못한 것이다.

의문을 풀 실마리를 보여주는 숫자가 있다. 지난해 벤처기업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은 4.7%로 그전 해와 비교하면 오히려 1.3%포인트 줄었다. 자본 규모가 작은 벤처들은 외부 자금 없이 R&D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다. 신생 벤처를 위한 투자 풀은 넉넉지 않고, 벤처의 희망인 코스닥도 10년 이상 제자리걸음이다. 벤처 생태계에서 자금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 역할을 한다. 결국 자생적 자금조달이 취약한 상황에서 벤처 숫자만 몇 배로 늘어난 셈이다.

우리에겐 세기말 벤처 붐이 대박의 꿈을 꾸는 투기판으로 변질되며 결국 거품으로 사그라진 쓰라린 기억이 있다. 어쩌면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벤처 투자를 조심스러워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껏 부풀어 오른 벤처생태계에 적절한 수혈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저성장 시대 한국이 계속 성장해가려면 결국 벤처밖에 없다. 창조경제로 방향을 세웠다면, 이젠 붐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정도 거품이 생기더라도 군불을 지펴야 한다. 과거 홍역을 치르면서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에 벤처 붐이 거품으로 부풀어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벤처 붐이 필요한 때다.

이은정 < 한국맥널티 대표·여성벤처기업협회장 eunjlee@mcnult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