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현재 온도는 26도 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은 사실 엄청난 성취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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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의 철학 / 장하석 지음 / 오철우 옮김 / 이상욱 감수 / 544쪽 / 2만7000원“토대가 잘 다져진 믿음의 토대에는 토대가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실’의 근거는 뭘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가 10년에 걸쳐 쓴 과학철학서다. ‘지구는 나이가 40억년을 훌쩍 넘겼다’ ‘태양은 약 1억5000만㎞나 멀리 떨어져 있다’ ‘태양에서는 수소폭탄의 폭발과 같은 핵융합을 통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등과 같은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됐을까.위와 같은 명제는 수많은 연구와 긴 논쟁을 거쳐 우리에게 사실로 각인됐다. 지구와 태양 같은 거대한 소재뿐 아니라 아주 사소한 과학적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가 천착한 주제는 바로 ‘온도측정법’. 우리가 쓰는 온도계가 온도를 정확히 알려준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섭씨 100도’로 알고 있는 비등점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 ‘끓음’이란 도대체 어떤 현상인지 등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적 논쟁, 철학적 논의를 거쳐 굳어진 ‘온도계의 철학’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순한 지식이 실제로는 굉장히 놀라운 성취물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의 끓는점과 어는점 등 ‘고정점’을 초창기 과학자들은 통일하지 못했다. 어떤 일치도 없이 각자 특정한 장인(匠人)이 만든 기준을 사용했다.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런던 왕립학회 서기 에드먼드 핼리는 ‘포도주의 정령’이라고 부른 알코올의 끓는점을 고정점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1660년 무렵 오토 폰 구에리케는 ‘첫 번째 밤 서리’의 온도를 고정점으로 주장했고, 여러 논의를 거쳐 섭씨 온도를 제창한 스웨덴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의 연구에 의해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물의 끓음과 얾을 고정점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합의가 등장했다. 하지만 끓는점은 기압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물에 담긴 온도계 자루에 있는 수은이 온도계 아래쪽 뿌리에 있는 수은과 다른 온도에 있는 것도 문제였다. 끓기 시작할 때와 ‘맹렬하게’ 끓을 때의 온도 사이 어떤 게 끓는점인지에 대한 논란도 분분했다. 물 속에 들어 있는 용해공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4주 동안 플라스크를 흔들어 댄 과학자(장 앙드레 드 뤄크)도 있었다. 많은 과학자들의 실험과 논쟁을 거쳐 물 자체의 온도보다는 물이 끓을 때 생겨난 증기 온도를 고정점으로 하는 ‘증기점’의 고정성이 도출됐다. 각 장의 뒷부분에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저자의 과학철학적 분석이 붙어 있다.
저자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의 친동생으로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를 졸업하고 2010년 40대 초반에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로 초빙됐다. 이 책은 2006년 ‘과학철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받기도 했다.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라고 하지만 세계적 석학이 쓰는 데 10년이 걸린 책인 만큼 읽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학문이란 깊이 들어가보면 다 그렇다”고 말하는 저자의 거대한 성과를 차근차근 뒤따르는 도전의 의미는 그만큼 충분하지 않을까.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