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 1병영] 박을규 원신월드 사장, 교장댁 막내의 홀로서기…"남는 장사였던 3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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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7
나의 병영 이야기
10·26사태 직후 공군으로 입대
보급 담당하며 축구·웅변 대표도
"뭐든지 하면 된다" 자신감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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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10·26사태 직후인 그해 12월 입대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군 생활은 엄격 그 자체였다. 지금처럼 유연한 군 생활이 아니었기에 집에서 느끼는 아들에 대한 걱정도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컸을 듯하다. 당시만해도 군에 갈 때 몸 성히 잘 있다 오라는 말이 일반화돼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막내인 나는 이 덕분에 동네에서 웬만한 잘못을 해도 그냥 넘어갔고 집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난 주변의 부담스러운 대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혼자 대전 공군교육사령부로 입소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부모님은 대문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혼자 대전 모텔에서 밤을 보냈다. 이게 막내 딱지를 떼는 첫 번째 시도였다.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아무튼 대전이란 낯선 곳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훈련병이지 교장 선생님의 막내아들은 아닌 셈이 됐다.

6주간의 기본 교육과 4주간의 특기 교육을 마치고 공군본부에서 보급담당이란 보직을 맡게 됐다.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권력’인 셈이었다. 장병들의 의식주를 움켜쥐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사회에 나와 유통업으로 진로를 결정짓게 된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품의 보관상태 점검부터 장부 재고정리 등 창고의 모든 보급품을 칼같이 정리해야 했다.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힘들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너무 편한 보직이었다. 나는 자대에 동기 없이 혼자 배치됐다. 일과를 끝낸 뒤 내무반 생활에 적응하려고 무척이나 마음고생도 했다. 동기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던 고참들이 왜 그리 부러웠는지. 아마 이때부터 더 강한 홀로서기를 하면서 내 인생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훈련병 때 칼바람이 몰아치는 활주로에서의 눈 치우기, 군화 뒤축에 쓸리어 생겨난 발 뒤꿈치 상처 때문에 다 헤어진 슬리퍼를 신고 눈 위에서 훈련 받았던 일, 탄피를 잃어버린 고문관 때문에 밥이 떨어져 꽁치 반찬 6마리로 저녁을 때웠던 일. 이런 경험들은 “세상에 못 할 일이 어딨어. 하면 되지”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 군 생활 동안 참모총장배 축구대회 재경지구 대표로 선발돼 체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각종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서 대중에 대한 설득·호소 능력을 갖추게 된 것, 모두가 군이 내게 준 큰 보물이었다. 이 모든 군 경험들이 현재 쇼핑아울렛 W몰을 운영하는 업체 대표로 있으면서 각종 경쟁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군 생활은 비록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배운 게 훨씬 많은 시간이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35개월간의 군 생활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박을규 < 원신월드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