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남겨진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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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7
美 유학시절 개인수업 해주던 교수님
"네가 교수가 된 후 제자들에게 갚아라"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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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학기가 시작되던 첫날, 담당교수님는 나를 불러내어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교수회관 라운지로 데려가 커피 한 잔씩을 사서 테이블 위에 놓고 마주 앉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게 첫날 수업이 어땠는지 물었다.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어떻게 이해되는지 질문을 해왔다. 나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얘기를 이어가다가 그것이 오롯이 또 하나의 수업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개인수업은 매일 한 시간씩 여름학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나는 그 대화의 과정을 통해 문학감상은 물론 그 교수님이 보여준 세밀한 관심이 길고 험한 유학생활의 첫걸음을 든든하게 붙잡아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 마지막 날, 교수님은 “이 개인수업은 후일 당신이 교수가 되면 다른 학생에게 갚으면 된다”는 말로 내가 교수가 된 뒤 갚아야 할 빚으로 남겨주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졸업논문 작성을 앞두고 다시 그 교수님을 찾아갔으나 자신이 암 투병 중이라면서 다른 교수를 소개해줬다. 대신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나의 고군분투에 대한 연민이 남아서인지 두 번째 개인교습을 제안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만 신분 상승을 꾀할 수밖에 없다는 관습에 결연히 맞서는 여주인공 엘리자벳을 멀리 한국에서 온 여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안타깝게도 그 교수님의 부고는 내가 박사과정을 위해 다른 대학으로 떠난 그해에 들려왔다. 미국의 작은 도시 대학캠퍼스에 고립되어 오직 책과 씨름해야 했던 나는, 어쩌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유학생활의 첫 단계에서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이다. 두고두고 내 제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며, 남겨야 할 유산이기도 하다.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