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구재상 "70조 굴리던 때보다 고객 찾아 발로 뛰는 지금이 행복"
입력
수정
지면A33
구재상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 대표“주식 투자에 성공하는 비결은 매도 시기를 잘 찾는 겁니다. 잘 팔면 항상 새로운 기회가 오거든요. 내년엔 유가 등 상품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주식시장 전망이 무척 밝습니다.”
미래에셋 부회장 직함 던지고 詩짓기·운동하며 '인생2막' 설계
6월 10여명과 투자자문사 설립…社名은 투자세계 풀어가는 열쇠
동양사태 보며 신뢰 의미 되새겨…나는 4학년9반…15년 더 일하겠다

◆대학 땐 성적장학금 안 놓쳐…태권도 4단

“대학 시절 줄곧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방범대 활동이나 교통정리 등 아르바이트도 참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조금이라도 사회생활을 경험했던 게 경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구 대표는 대학 때 태권도부 활동을 했다. 체육관에 워낙 자주 드나들다 보니 졸업할 때 체육학과 출신으로 오해받을 정도였다. 태권도 4단 단증도 땄다. 170㎝가 안 되는 단신이지만 지금도 다부진 인상을 주는 이유다. 그는 “증권사에 입사한 뒤에도 유도 등을 꾸준히 수련했고 태권도의 경우 국가대표 선수들과 겨룰 만큼 자신이 있었다”며 “5년 전쯤에 검도를 하다 인대가 끊어진 뒤엔 골프까지 잠시 쉬었다”고 말했다. 매일 운동하던 습관이 몸에 배서 그런지 지금도 오전 5시면 일어나 피트니스센터에서 한 시간씩 땀을 흘린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펀드매니저로서 체력 관리가 기본이란 생각에서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의 23년 인연
구 대표가 박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12월이었다. 한신증권(동원증권 전신) 본사 주식부 사원으로 발령받았을 때 같은 부서 과장이 박 회장이었다. 회삿돈 수천억원을 직접 운용·관리하는 부서였다. 한신증권에 입사한 지 1년 반 만이다. “1980년대 말엔 증권사가 인기 직장이었기 때문에 경영학 전공자로서 자연스럽게 증권사에 입사했지요. 증권사 생활이 생각보다 잘 맞았고 초고속 승진의 영예까지 안게 됐습니다.”
입사 당시 650선이던 코스피지수는 단기간 내 1000을 돌파했다가 이후 10년가량 바닥을 기었다. 외환위기 때는 290까지 떨어진 어려운 시기였다. 구 대표는 “어려운 증시 환경에서 8년간 영업을 했던 게 2000년대 들어 수십조원을 운용했던 힘이 됐다”며 “어린 나이에 지점장을 달고 난 뒤 관리자 경험을 쌓는 운도 따라줬다”고 회상했다.
그는 “1990년대 약세장에서 오히려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보다 매도 시기를 잘 찾은 덕분이었다”며 “외환위기 직전엔 주식 계좌를 대부분 현금화해 폭락장에서 선방할 수 있었고 덕분에 당시 고객들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주식을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잘 팔면 항상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다.
구 대표의 자산운용 철학은 뭘까. “기업의 내재가치를 살펴보는 건 기본에 속합니다. 저는 특히 성장성을 눈여겨봅니다.” 예컨대 미국 테슬라모터스 같은 전기차 회사의 성장성을 보고, 국내 배터리 회사의 미래를 따져보는 식이다.
그는 다만 박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워했다. 20년 넘게 동고동락하는 과정에서 미래에셋그룹을 같이 창업했고, 또 결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10월 박 회장, 최 부회장과 마지막 점심식사를 한 뒤 미래에셋을 영원히 떠났다.
그는 “미래에셋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뒤 실행에 옮기기까지 1년 정도 걸렸다”며 “아쉬움이 컸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스스로 창업하고 회사를 키우고 싶었다”고 전했다.
◆“투자자의 열쇠 되겠다”…49세 창업
작년 말 미래에셋을 떠난 뒤 구 대표는 시와 철학 등 인문학의 매력에 푹 빠졌다. 대학 졸업 후 처음 가진 여유라고 했다.
“대학교수님들을 찾아뵙고 철학을 배우고 시 쓰는 법을 배웠지요. 약 7개월간 휴식기를 가지면서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그는 지난 6월 10여명의 직원을 뽑아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을 세우고 서울 여의도 증권가로 돌아왔다. 한국(Korea)의 대표(K) 금융회사로서, 투자자들의 열쇠(클라비스는 열쇠란 뜻의 라틴어)가 되겠다는 포부다.
아이 이름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회사 이름을 짓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찐만두를 집어들면서 구 대표는 ‘작명의 비화’를 소개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다 뒤졌는데 웬만한 좋은 이름은 이미 다 등록돼 있었어요. 인터넷 도메인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았고요. 지인의 소개로 테너 가수인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만났는데 이 분이 의미와 운율 등을 따져서 선뜻 지어주더군요.”
열쇠는 복잡한 투자세계를 풀어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어 글로벌 금융사들도 상징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창업 당시 시장 분위기는 녹록지 않았다. ‘버냉키 충격’ 이후 국내외 증시가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 대표는 “돌이켜보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더 많은 기회가 왔던 것 같다”고 했다.
침체장 속에서도 케이클라비스엔 증권사 창구를 통해 꾸준히 자금이 유입됐다. 구 대표의 이름만 믿고 돈을 맡긴 개인 고객이 대부분이었다. 창업 후 5개월 만에 3700억원의 자금이 모였다. 그는 “미래에셋 시절엔 하루에도 2000억~3000억원씩 자금이 들어왔다 나갔지만 지금은 스스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일할 맛이 난다”며 “다행히 처음 개설한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이 18%를 웃돌 정도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고객 위해 최소 15년 더 일하겠다”
구 대표는 저녁 코스의 마지막 요리로 기스면을 시켰다. 넌지시 얼마나 더 일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미국에선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50세를 넘어서도 열정적으로 일하더라”며 “일단 창업을 했으니 우리 고객을 위해서라도 최소 15년은 더 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코스피지수가 2000을 넘든 안 넘든 투자 시점을 예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며 “다만 부동산 시장이 개선되고 있고 내년엔 유가 등 상품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아 주식시장 전망은 무척 밝은 편”이라고 소개했다.
한때 70조원을 굴렸던 ‘Mr. 펀드맨’은 자산 규모를 얼마까지 키우고 싶을까. 구 대표는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일단 3000억~4000억원 수준은 아닌 것 같다”며 “자산 규모가 커야 투자전략을 짜거나 해외에 분산할 때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회가 주어지면 해외시장에서 헤지펀드의 모든 영역인 주식 채권 환율 등 해외 자산 배분을 해보고 싶다”며 “투자부문이야말로 한국 금융회사들이 해외에서 승부를 걸 때 가장 승산이 있는 분야”라고 했다. 구 대표는 “요즘 동양사태를 보면서 고객의 신뢰 없이는 금융회사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조재길/안상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