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위의 '또 다른 甲',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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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지난 8월 서울에 있는 한 식품업체 본사.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회사 경영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2009년 불공정 계약에 의해 부당하게 퇴출된 대리점주들에게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이 건으로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이미 냈다. 하지만 을지로위원회는 공정위 조치와 관계없이 돈을 물어주라고 요구했다. “만일 시행하지 않으면 청문회에 부르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乙 보호 명분 野의원들, 기업 54차례 직접 방문
"계약서 모두 보자, 보상하라" 요구
사회적 약자인 ‘을(乙)’을 보호하겠다며 민주당이 을지로위원회를 만든 지 10일로 6개월이 된다. 을지로는 ‘을(乙)을 지키는 법(law), 길(路), 노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민주당은 설명하고 있다. 민주당은 을지로위원회가 6개월간 54차례 기업 현장을 방문하고 14건의 합의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협력업체와 가맹점주 등 소위 ‘을’을 대변해 불공정 거래 관행을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물론 정부와 학계 등에서는 을지로위원회의 활동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을지로위원회가 기업을 방문한 뒤 회사 측에 보상이나 양보 등 행정 조치를 요구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사실상 공정위 역할을 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도 심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불공정 계약이 존재하는지 파악한다고 관련 계약서를 모두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황당해 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을지로위원회가 대리점주나 가맹점의 위임을 받아 회사 측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상생협의회는 그 자체로 불평등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들과 ‘피의자’인 기업이 함께 논의기구를 만든다면 결국 국회의원들의 뜻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긍정적 평가도 있다. “업계의 의견을 듣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노병용 롯데마트 사장)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입법이 아닌 행정을 하려는 것은 문제’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박오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치인은 기업에 갑일 수밖에 없고 이런 점에서 을지로위원회의 활동은 또 다른 갑을관계의 형성”이라고 지적했다.
유승호/최만수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