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진 교수의 경제학 톡] (59) 계약문화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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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진 < 동국대 경제학 교수 sejinmin@dongguk.edu >지난번 소개한 세계은행의 기업환경 보고서에서 한국이 전체 189개국 중 7위를 차지한 데에는 순위가 좋은 분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는 3년 연속 2위를 차지한 ‘계약 집행(enforcing contract)’ 분야가 있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계약서 없는 거래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보도를 종종 접하는데, ‘계약 집행’ 분야가 3년 연속 2위라니 언뜻 납득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시나리오로 계약 불이행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몇 개의 절차로, 얼마나 시간이 걸려, 어느 정도의 비용으로 해결되는가를 평가한 결과다. 특히 한국은 분쟁 해결 기간이 짧고 변호사 비용이 적은 편이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즉 계약서가 있고 이것이 위반됐을 때 소송을 건다면 비교적 신속하고 저렴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계약서가 작성되지 않은 거래가 많고, 위반되더라도 피해기업이 소송을 걸지 않거나 못하는 데 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거래 양방의 협상력(bargaining power)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만, 보다 큰 그림에서는 이른바 계약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계약이란 둘 이상의 주체가 합의한 바가 법적 효력을 갖도록 약속하는 법률 행위다. 법률 행위이기 때문에 계약을 위반하면 법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되지만, 계약의 핵심은 당사자들이 애초에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계약은 자유로운 신분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적이고 자발적인 계약이라도 정부가 법규제를 통해 개입할 수 있다. 정부의 제한없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자유를 ‘계약의 자유’라 하는데, 계약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가는 법체계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20세기 초반 환자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의사가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허용한 판례가 있을 정도로 계약의 자유를 존중한다. 물론 이후 미국에서도 계약의 자유에 많은 제한이 더해졌다지만, 미국 영국 등이 속한 보통법(common law) 체계에서는 대체로 계약의 자유를 매우 존중한다. 이와 달리 한국이 속한 대륙법(civil law) 체계에서는 계약 분쟁이 생겼을 때 관련법에 담겨 있는 원칙이 지켜졌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계약의 자유가 보통법 체계보다 제한적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계약문화가 더욱 발달한 것은 계약의 자유를 누리면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계약서의 존재를 강조하고 더 정교한 계약서를 작성해 위반 없이 이행하려는 노력이 정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미성숙한 계약문화가 법체계만의 문제도 아니고, 법체계라는 것이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계약서 없는 거래 관행 문제를 문화에 기대 해결할 수 없다면 법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약서를 쓰지 않을 자유를 제한하는 데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편익이 크지 않을까 믿기 때문이다.
민세진 < 동국대 경제학 교수 sejinmin@dongguk.ed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