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현실로 닥친 가상화폐…'현찰 폐지론' 불 붙는다

화폐생활과 통화정책 여건 급변
'한국은행 축소론' 힘 실릴 수도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비트코인, 라이트코인, 피어코인, 네임코인, 비비큐코인 등 최근 들어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처럼 태어나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포인트 마일리지, 쿠폰, 지역공동화폐 등 대안화폐도 상용화되고 있다. 바야흐로 현찰(법화·legal tender)이 필요없는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개인의 화폐 생활이 변함에 따라 통화정책 여건도 급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종전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함에 따라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각국 중앙은행은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가상화폐 확산’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 중이다. 이론적으로 가상화폐(대안화폐 포함)가 확산됨에 따라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대목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본원통화의 대체문제다. 갈수록 본원통화의 상당 부분을 가상화폐가 대체해 나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앙은행 입장에서 보면 본원통화 축소에 따른 화폐발행차익의 감소를 의미한다. 특히 화폐발행차익 감소는 통화정책 수행비용의 재정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중앙은행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둘째, 중앙은행의 금리조절 능력은 가상화폐를 누가 발행하느냐와 가상화폐가 어느 단계까지 발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중앙은행 이외의 다른 주체들이 가상화폐를 발행할 경우 현금보유 성향 저하로 중앙은행의 금리조절 능력은 크게 약해진다. 또 가상화폐가 현금통화와 결제성 예금까지 대체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하면 발행 주체와 관계없이 중앙은행의 금리 조절 능력은 심할 경우 무력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셋째, 가상화폐 발달로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커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통화승수이론에 따르면 통화량은 본원통화와 통화승수에 의해 결정되고, 통화승수는 현금보유비율과 지급준비율에 따라 좌우된다. 이 이론대로라면 가상화폐가 현금통화를 대체하면 통화승수는 커지게 된다.

넷째, 가상화폐 발달은 여러 각도에서 통화정책의 전달경로(통화공급 조절→금리 변화→총수요 증감→성장률 또는 물가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 가상화폐 발달로 모든 금융거래에 있어서 위험 헤지가 수월해짐에 따라 경제주체들이 금리 변화에 덜 민감해져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떨어지는 점이 가장 우려된다.

가상화폐에 따른 본질적인 문제와 함께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한국은행의 예측력을 강화하는 과제도 시급하다. 지금처럼 다른 전망 기관보다 늦게, 그것도 예측력이 월등히 높지 않고서는 한은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거나 선제적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모델 재설정, 시계열 일관성 유지, 정성(定性)적 평가 등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 한다. 특히 신뢰를 확보하는 과제는 통화정책 경로에서 금리와 총수요 간 민감도를 끌어올리는 데도 중요하다. 가상화폐 확산 등으로 갈수록 불확실하고 길어지는 통화정책 경로에서 한은 총재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말을 자주 바꾸거나,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예측치를 언급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통화정책 추진 과정에서 흐트러진 정책수단과 중간조작, 최종목표 간 인과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이를테면 한은 입장에서 성장과 물가 간 우선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 금리조작이냐 통화량 변경이냐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추세적으로 물가가 안정된 시대에서는 한은 목표, 통화정책 관할범위, 적정금리 산출방식, 감독범위 등도 재설정해야 한다.

가상화폐 확산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맞게 새로운 통화지표를 개발해 통화유통속도, 통화승수 등을 정확히 추정해야 한다. 갈수록 가속력이 붙을 가상화폐 발행에 대한 규제와 위조지폐 방지 등을 통해 ‘폐지 또는 무용론’까지 불고 있는 현찰(법화)의 위상도 강화해야 할 때다. 각종 가중치와 산출방식 현실화를 골자로 한 통계개편 작업도 서두를 필요가 있다. 모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은의 독립성이 강화돼야 한다. 고유권한인 금리 결정의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면한 한은 총재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구성 시 관료 위주나 특정 인맥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대통령은 한 번쯤 고심하고 지켜줘야 한다. 현재 일부 금융통화위원은 임명 때부터 전문성 등에 의심을 받아왔다.

한은 임직원들도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가상화폐 발달 등에 따라 우려되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정책 수단을 개발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매너리즘에 빠져 관행대로 통화정책을 추진했다가는 효과는 고사하고 독립성과 신뢰성에 손상을 받으면서 ‘한은 축소론’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