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아·태국장에 이창용] 외환위기 때 '펜트하우스의 저승사자'…그 자리에 한국인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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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고위직 첫 진출 막전막후“2개 시중은행과 12개 종금사를 폐쇄하세요.”
경쟁자만 100여명…'바늘구멍' 뚫어
라가르드 총재 고심 끝 "내가 베팅" 낙점
외환위기 한파가 몰아닥쳤던 1997년 11월28일 서울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에 들어선 한국 정부 대표단은 휴버트 나이스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국장의 혹독한 구조조정안에 치를 떨었다. 짧은 머리에 건조한 표정의 나이스 국장은 고금리-고환율-고강도의 긴축 프로그램을 앞세워 외환이 바닥난 한국 경제에 전대미문의 고통을 강요했다. 정부와 언론은 나이스 국장에게 ‘저승사자’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 ‘악명’ 높던 아·태국장 자리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임명됐다. 이창용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가 그 주인공이다. IMF는 27일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가 이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아·태국장에 지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IMF 아·태국장은 40여개 아시아 국가에 대한 경제 금융상황 감시와 비상시 구제금융을 포함한 지원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임기는 3년.
소식을 접한 정부는 격세지감에 빠져들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으로선 단순히 국제기구의 최고위직 한 명을 배출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이 내정자도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IMF는 한국인에게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는 국제기구”라며 “개인적으로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학자에서 관료로 변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깊다”고 덧붙였다. 실제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던 이 내정자가 정부에 차출된 배경에는 IMF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미 재무부의 핵심,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이 이 내정자의 하버드대 지도교수였다는 인연이 작용했다. 이 내정자는 정부자문단이라는 직책을 맡아 미국 측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이 내정자의 ‘IMF행 프로젝트’는 지난 7월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현 아·태국장인 인도 출신 아눕 싱이 내년 2월 임기가 끝난다는 사실을 안 후 이 내정자를 그 자리에 앉혀야겠다고 결심했다. 국제금융계에 폭넓은 네트워크를 가진 실력 있는 이코노미스트라는 점 외에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을 지낸 경력이 먹혀들 것으로 판단한 것.
현오석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공모가 시작된 직후인 올 8월 기재부에서 IMF로 파견된 윤종원 이사를 통해 라가르드 총재에게 추천서를 전달했다. 현 부총리는 9월 러시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와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차총회 등에서 라가르드 총재를 만날 때마다 이 내정자를 추천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서머스 전 미 재무부 장관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제자인 이 박사가 IMF 국장을 맡을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순간에도 한국 정부의 물밑 작업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정치무대에서 한국에서 IMF 최고위급을 배출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모로 선발하는 IMF 아·태국장 자리에는 세계에서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리면서 막판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지원자는 1차 국장단 면접에서 상당 부분 걸러졌다. 2차 부총재단 면접으로 더 추려진 후보자들은 마지막으로 라가르드 총재의 면접을 거치면서 3~4명으로 압축됐다. 이때 IMF 내에선 내부 인사를 발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왔다.
고심을 거듭하던 라가르드 총재는 공식 발표 이틀 전인 지난 25일 윤 이사를 불러 “이 박사에게 ‘베팅’하기로 했다”고 낙점 사실을 통보했다. 이 내정자가 아시아 경제에 높은 이해도와 깊은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 내정자는 내년 2월10일 취임한다.
이심기 기자/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