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옛 그림으로 풀이한 고사성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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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엽 지음 《촌철살인 고사성어》, 루비박스, 320쪽, 1만4000원
백발이 성성한 네 명의 노인이 깊은 산중의 고목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다. 두 노인은 골똘히 다음 수를 찾고 있고 한 사람은 두 사람의 수 싸움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다. 또 다른 노인은 차를 다리는 동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듯하다.
네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은 왜 이런 깊은 산중에 들어온 것일까. 명나라 말기에 제작된 목판화 ‘상산사호’는 보는 이에게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들은 중국 진나라 말기 난세를 피해 섬서성의 상산에 숨어살았다는 동원공, 하황공, 각리선생, 기리계 등 네 명의 은사다. 이들은 모두 머리와 수염이 희기 때문에 ‘힐 호(皓)’자를 붙여 상산사호(商山四皓)로 불린다. 난세에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산 속에 은둔한 선비를 은사라고 하는 데 동아시아에서는 이들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존경해왔다. 미술사학자 김상엽씨(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의 《촌철살인 고사성어》는 그간 개념으로만 설명되어 온 고사성어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그림 속에 어떻게 서로 다르게 그려졌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이미 2005년 《삼국지를 보다》를 통해 한중일의 삼국지 관련 그림의 차이점을 명쾌하게 해설하는 등 동일한 주제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는지 분석한 바 있다.
책 제목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데 이는 가장 짧은 글로 가장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는 사자성어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심오한 뜻일망정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옛 사람들이 고사성어를 이미지로 그려 전달하려한 것은 그런 깊은 속뜻에서다.
항우가 벼랑 끝에 몰린 철체절명의 상황을 뜻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벼슬살이하던 도연명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심회를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을 담은 ‘빈모여황(牝牡驪黃)’의 고사는 그렇게 해서 무지렁이의 우매함을 깨우치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됐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옛사람의 지혜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하고 재해석한다. 양나라 과부 고행이 왕이 자신의 미색을 탐하자 스스로의 코를 베 일부종사의 결의를 보인 ‘고행할비(高行割鼻)’의 고사를 남성위주 사회의 입장을 반영했다고 간주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재단하는 태도는 지양해야한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과거는 과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그 진정한 가치를 오늘에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선인의 지혜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촌철살인’의 지혜로 다가오는 이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백발이 성성한 네 명의 노인이 깊은 산중의 고목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다. 두 노인은 골똘히 다음 수를 찾고 있고 한 사람은 두 사람의 수 싸움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다. 또 다른 노인은 차를 다리는 동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듯하다.
네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은 왜 이런 깊은 산중에 들어온 것일까. 명나라 말기에 제작된 목판화 ‘상산사호’는 보는 이에게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들은 중국 진나라 말기 난세를 피해 섬서성의 상산에 숨어살았다는 동원공, 하황공, 각리선생, 기리계 등 네 명의 은사다. 이들은 모두 머리와 수염이 희기 때문에 ‘힐 호(皓)’자를 붙여 상산사호(商山四皓)로 불린다. 난세에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산 속에 은둔한 선비를 은사라고 하는 데 동아시아에서는 이들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존경해왔다. 미술사학자 김상엽씨(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의 《촌철살인 고사성어》는 그간 개념으로만 설명되어 온 고사성어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그림 속에 어떻게 서로 다르게 그려졌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이미 2005년 《삼국지를 보다》를 통해 한중일의 삼국지 관련 그림의 차이점을 명쾌하게 해설하는 등 동일한 주제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는지 분석한 바 있다.
책 제목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데 이는 가장 짧은 글로 가장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는 사자성어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심오한 뜻일망정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옛 사람들이 고사성어를 이미지로 그려 전달하려한 것은 그런 깊은 속뜻에서다.
항우가 벼랑 끝에 몰린 철체절명의 상황을 뜻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벼슬살이하던 도연명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심회를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을 담은 ‘빈모여황(牝牡驪黃)’의 고사는 그렇게 해서 무지렁이의 우매함을 깨우치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됐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옛사람의 지혜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하고 재해석한다. 양나라 과부 고행이 왕이 자신의 미색을 탐하자 스스로의 코를 베 일부종사의 결의를 보인 ‘고행할비(高行割鼻)’의 고사를 남성위주 사회의 입장을 반영했다고 간주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재단하는 태도는 지양해야한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과거는 과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그 진정한 가치를 오늘에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선인의 지혜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촌철살인’의 지혜로 다가오는 이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