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우리에게 블레어는 없는가?

종북포용 자충수 두는 민주당
광우병 촛불시위 재연 기도 등
시대착오적 틀 부수고 개혁해야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shoonlee@snu.ac.kr >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의 현대사는 그만큼 굴곡도 심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4·19, 5·16, 유신, 그리고 5·18 같은 정변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였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태들이었다. 특히 5·18 광주의 비극은 우리 사회가 두고두고 치유해야 할 상처로 남아 있다. 절망적 궁지에 내몰린 학생운동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단순한 믿음 아래 친북으로 선회했다. 당시 철야농성 중이던 몇 학생과 어둠 속에서 나눈 대화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야권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했고 이어서 우파의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 대통령을 빼고는 모두 박빙의 승부였지만 진 쪽이 승복했기에 한국의 민주화는 극심한 대결구도 속에서도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여야의 행보는 균형을 잃어간다. 통합진보당 지하혁명조직(RO) 사건과 국가정보원 댓글에 대해서는 현재 공식 기관이 관련 사건을 수사 중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모두 이를 무시한 채 각각 통진당 해산과 특검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야가 이처럼 정상경로를 이탈해 폭주하는 배경에는 일각의 대선 불복도 있지만 종북세력에 대한 너무도 다른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북의 대남총국이 친북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남쪽 집단을 어떻게든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할까. 국정원이 그렇게 판단하고 연결 가능성을 조사조차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민주당은 국정원이 일체의 정치권 사찰을 금지하도록 요구하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 종북세력을 멀리 하는 것이 먼저다. 종북 사찰을 남남분열의 종북몰이로 규정하는 야권 일각과의 연대부터 포기해야 한다.

여당 지지의 보수우파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권의 전통적 부패세력을 혐오한다. 진보 야당의 지지층에도 투쟁 일변도와 종북 연대에 식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실망이 신당에 대한 기대를 부풀린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안철수 신당에는 여권보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더 많이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다. 종북문제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다수 여당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온 야당의 전략은 지난 정부 광우병 파동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정국을 제압한 촛불시위 여세는 총선과 대선의 압승으로 이어질 듯 거셌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의 장외 투쟁도 국정원 댓글 사건을 광우병 때의 촛불시위급 투쟁으로 재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사한 과잉선동은 다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민주당과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국정원 댓글 개입이 대선 결과를 뒤집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난 대선을 3·15급 부정선거라고 느끼는 국민은 거의 없다. 서로 비우호적이었던 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일을 현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민주당 문제의 핵심은 종북세력과의 연대에 연연하는 모습이다. 일부 신부가 북의 연평도 포격을 옹호한 다음에도 민주당 지도자는 ‘정부가 사제단까지 종북몰이’한다고 분노한다. ‘종박’이라는 비아냥은 수사로는 수준급이지만 자신들의 종북포용을 드러내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국민의 우려는 단연 종박보다 종북이다. 진보를 지향하는 신세대도 북한은 지지하지 않는다. 대학가의 투표성향은 야당이지만 운동권은 학생회 유지조차 힘겹다. 젊은 표들은 신당이 종북만 정리한다면 언제든 그쪽으로 몰려갈 것이다. 민주당이 살려면 종북까지 포용하는 조급한 집권 욕망을 버리고 진정한 진보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 장기집권으로 스스로 경직화된 틀에 갇힌 영국의 노동당은 결국 대처의 보수당에 정권을 빼앗겼다. 노동당은 대처의 개혁이 불러온 사회적 동요를 노리고 강경노선을 더욱 강화했지만 결과는 더 큰 참패였다. 시대착오적 틀을 부수고 당을 개혁한 토니 블레어가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노동당은 정권을 탈환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야권에도 블레어와 같은 개혁지도자가 필요하다.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