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피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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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한 방울의 피’는 서구 기독교 문화에선 속죄의 상징으로도 쓰여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림으로써 인간의 죄가 용서됐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재판관이 살을 떼어낼 수 있어도 피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고 판결 내린 것도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슬람교가 동물의 피를 먹지 못하게 하는 등 다른 종교에서도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이 많다. 피 한 방울의 부피는 대략 지름 50㎛(마이크로미터) 정도로 본다. 남자 성인 피의 양이 5~6L 정도라고 한다면 인간은 10만 방울에서 12만 방울의 피를 갖고 있는 셈이다.
피 검사를 할 때 쓰이는 양은 보통 5mg으로 100방울쯤이다. 피는 일반적으로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으로 구성되며 피 한 방울에 들어 있는 적혈구 수는 대략 2억5000만개다. 피의 주된 기능은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이다.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심장이 멈춰 피가 돌지 못할 때를 이른다.
피 한 방울은 과학자들에게도 중요한 테마다. 이미 AIDS 검사에서 시작해 당뇨병이나 콜레스테롤 검사들을 피 한 방울로 진단할 수 있는 기법이 실용화되고 있다. 최근 김영수 서울대병원 의공학과 교수팀은 피 한 방울로 각종 암을 쉽게 검사할 수 있는 분석 기법까지 개발해냈다. 이것이 실용화되면 기존 병원들의 최첨단 영상장비보다 10분의 1 가격으로 암진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피 한 방울로 모든 병을 간편하게 진단할 수 있는 원격 의료검사 시대가 곧 도래할 모양이다. 더구나 올해 6월 일본 이화학연구소팀은 피 한 방울로 복제 쥐를 만드는 데 성공한 터다. 이 연구팀은 혈액 속 백혈구 세포의 핵을 난자에 넣어 수정란을 배양하는 체세포 복제 방식을 택했다. 불경에선 물 한 방울에서 세상 이치를 깨닫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피 한 방울에서 인간의 모든 것을 아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실로 극대와 극소가 통하는 모양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