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피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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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20세기 초 미국 남부 주들 사이엔 ‘한 방울 규칙(One-drop rule)’이라는 게 있었다.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으면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흑인 판단이 어려웠을 때 사용하던 법칙이었다. 물론 백인들의 순혈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1967년 이 규칙은 위헌으로 판결났다. 이처럼 피 한 방울은 순혈주의자나 민족우월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단어였다.
‘한 방울의 피’는 서구 기독교 문화에선 속죄의 상징으로도 쓰여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림으로써 인간의 죄가 용서됐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재판관이 살을 떼어낼 수 있어도 피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고 판결 내린 것도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슬람교가 동물의 피를 먹지 못하게 하는 등 다른 종교에서도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이 많다. 피 한 방울의 부피는 대략 지름 50㎛(마이크로미터) 정도로 본다. 남자 성인 피의 양이 5~6L 정도라고 한다면 인간은 10만 방울에서 12만 방울의 피를 갖고 있는 셈이다.
피 검사를 할 때 쓰이는 양은 보통 5mg으로 100방울쯤이다. 피는 일반적으로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으로 구성되며 피 한 방울에 들어 있는 적혈구 수는 대략 2억5000만개다. 피의 주된 기능은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이다.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심장이 멈춰 피가 돌지 못할 때를 이른다.
피 한 방울은 과학자들에게도 중요한 테마다. 이미 AIDS 검사에서 시작해 당뇨병이나 콜레스테롤 검사들을 피 한 방울로 진단할 수 있는 기법이 실용화되고 있다. 최근 김영수 서울대병원 의공학과 교수팀은 피 한 방울로 각종 암을 쉽게 검사할 수 있는 분석 기법까지 개발해냈다. 이것이 실용화되면 기존 병원들의 최첨단 영상장비보다 10분의 1 가격으로 암진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피 한 방울로 모든 병을 간편하게 진단할 수 있는 원격 의료검사 시대가 곧 도래할 모양이다. 더구나 올해 6월 일본 이화학연구소팀은 피 한 방울로 복제 쥐를 만드는 데 성공한 터다. 이 연구팀은 혈액 속 백혈구 세포의 핵을 난자에 넣어 수정란을 배양하는 체세포 복제 방식을 택했다. 불경에선 물 한 방울에서 세상 이치를 깨닫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피 한 방울에서 인간의 모든 것을 아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실로 극대와 극소가 통하는 모양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