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일자리보다 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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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설 편집국 미래전략실장 yskwon@hankyung.com웬만한 크기의 식당이면 한두 테이블만 꾸준히 손님이 들어도 유지된다. 큰 투자가 없는 회사라면 직원 인건비의 1.5배 정도 현금이 매달 있으면 성장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 개인이나 조직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큰돈보다는 작은 규모라도 꾸준한 현금흐름(cash flow)이 훨씬 도움이 된다.
생계선 돌파가 가장의 평생 과제 평범한 사람들, 특히 가장들이 평생을 걸고 넘어야 할 선이 ‘생계선’이다. 이 선을 넘고 나면 부자선, 명예선, 행복선 등이 있을 것이다. 운 좋은 이들은 30~40대에 재산을 축적해 이 선을 훌쩍 넘고 또 다른 인생을 즐기지만 대부분 가장들은 이 생계선 돌파를 위해 평생을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 땅의 평범한 가장들이 생계선을 돌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적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현금흐름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기술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타나는데 중년의 경험과 경력을 존중하며 계속 돈을 줄 수 있는 회사는 점점 줄어갈 수밖에 없다. 은퇴 후 당연시되던 가족창업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집이라도 잡혀 밑천을 마련해야 하는데 떨어진 부동산은 그마저 불가능한 일로 만들었다.
주위를 보면 여전히 건강한 나이에 회사 밖으로 내몰리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열심히 발품을 팔지만 성과는 적다.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퇴직자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찾는 것은 ‘일자리’다. 월급을 덜 받아도 좋으니, 직급은 낮아도 좋으니 취직만 시켜달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방향이 잘못됐다. 일자리가 아니라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내 책상’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킬 일’을 달라고 해야 한다. 최근 방한했던 세계적인 미래학자 토머스 프레이는 앞으로 직업(job)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평생 5~6개의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게 지금이라면 평생 수백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미래라는 것이다. 자리나 경력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는 일(work)이 더 중심이 된다는 얘기다. 회사들은 이제 마케팅 임원이나 영업부장을 찾지 않는다. 대신 ‘중국 OO시에 가서 3개월간 시공 감독할 경력자’를 찾는 식이다. 은퇴자들이 가질 만한 직급이나 직책은 사라지게 돼 있다.
회사원이라면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포트폴리오를 잘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1주일짜리 단기 과제, 1개월짜리 출장, 심지어 하루짜리 파트타임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직업이 아니라 프로젝트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하지 않을 때는 정책로비를 통해서, 또 단체행동을 통해서 내 몫을 챙기려는 갈등이 커지게 돼 있다. 그러나 집단에 기댈 수 있는 시대는 지났고, 내게 그 혜택이 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차라리 더 복잡해진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거리가 무엇인지 고독하게 찾는 게 낫다. 물론 고단한 일이다. 가장이라는 자리, 누구를 책임지는 자리는 원래 그렇다.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도움 안 되는 과거도 잊어야 한다. 뭐든 새로 배우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일거리를 받아내야 한다. 그래야 생계선을 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진다.
밖은 12월, 칼바람이 무심하게 불고 있다.
권영설 편집국 미래전략실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