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역할 강조한 동양·개성 묘사한 서양…초상화에 나타난 인간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28) 동양과 서양의 초상화
국내 박물관에 갈 때마다 자주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왜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늘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검은색 관복과 관모를 착용한 것도 그렇고 평면적이고 원근법이 결여돼 있는 점도 그렇다. 반면에 서양의 초상화는 자세가 다양하고 복장도 화려하다. 명암법과 원근법도 완벽하게 구사돼 마치 살아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듯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단언컨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화가들의 솜씨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은 바로 동아시아 유교사회와 서구의 인간관의 차이에 있다. 초상화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 만큼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관념이 투사돼 있기 때문이다.
앵그르의 ‘리비에르 초상’(1805년)
서양에서 개인에 대한 관념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다. 서구의 개인은 ‘타인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닌 존재’로 정의된다. 이런 관념이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을 중시한 회화전통과 결합해 모델의 개성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초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모델의 개성 표현에 관심이 집중됐던 만큼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동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세기 전반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1780~1867)가 그린 ‘리비에르 초상’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상원의원을 지낸 필리베르 리비에르는 왼팔을 상의 안에 찔러 넣고 팔자 다리를 한 것으로 보아 자유로운 영혼의 인물임을 알 수 있고 책상 위에 놓인 루소의 저서와 모차르트 악보는 그가 만만찮은 교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동아시아 유교사회에서의 개인은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기보다 집단의 화합과 안정을 도모하도록 권장됐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인간형이다. 처세를 중시한 건 그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크게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손윗사람과 아랫사람, 친구와 친구 등 다섯 개의 범주로 나눠 관계를 맺는 상대에 따라 그에 걸맞은 행동양식을 발현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개성보다는 역할을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초상화도 개성적인 외모를 묘사하기보다는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유교사회의 이상적인 개인은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관료 중에서도 국가의 안녕에 공을 세워 공신(功臣)으로 책봉되는 것은 최상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명기의 ‘오재순상’(1791년)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국가는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사당에 안치하고 주기적으로 제례를 베풀었다. 이런 공신 초상화는 곧 사대부 사회에 제례용 초상화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져 광범하게 제작됐다.신은 유교사회의 롤모델인 만큼 외형의 치밀한 묘사보다는 역할의 묘사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개성보다는 관료로서의 위엄과 고귀한 성품을 드러내야 했다. 그 때문에 자세와 표정의 다양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호랑이 가죽이 덮인 의자에 앉아 하나같이 위엄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후손의 경배 대상인 만큼 흐트러진 자세와 체통을 잃은 표정을 보여서는 곤란했다. 18세기 말의 화원화가인 이명기가 공신 초상화의 양식을 따라 그린 ‘오재순상’에는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초상화의 미적 가치를 서양 초상화와 동일선상에서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양의 초상화는 하나의 예술적 자율성을 지닌 작품으로, 동아시아의 제례용 초상은 집단적 이상을 드러낸 목적 예술로 파악하고 제각기 다른 미적 잣대를 적용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동아시아와 서양의 초상화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바탕으로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 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