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일요일의 자유

"일요일은 합법적 게으름의 시간
온전히 자기자신의 주인공 되어
새 생명력 수혈받고 부활하기를"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
새해 벽두 새 달력을 펼쳐 보니, 우와, 일요일이 쉰두 번이다.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일요일을 기다렸던가! 어른이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설레며 일요일을 기다린다. 일요일마다 동네 공중목욕탕엘 갔다. 김이 뿌옇게 서리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목욕탕에서 불은 때를 벗기고 나면 기분이 쾌적해졌다. 목욕탕을 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 코와 이마는 반짝거리고, 콧노래는 절로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삶은 빨랫감들을 빨래방망이로 팡팡 두드리고, 비비고, 쥐어짜고, 물기를 털어서 빨랫줄에 너는 동안 나는 조용히 책을 읽었다.

빨래를 끝낸 뒤 어머니는 묵은 김치로 전을 부쳐주셨다. 김치전은 일요일에만 맛볼 수 있는 우리 집의 특식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팔순이고, 이마를 맞댄 채 김치전을 나눠 먹던 오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산다. 나는 날마다 책에 코를 박고 살며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한다. 도무지 기쁨이라곤 없는 일에 매달려 한 주일을 보내는 동안 거의 빈사지경에 이른다. 일요일에 나는 일손을 털고 종일 빈둥거린다. 나는 일요일마다 마치 잿더미 속에서 불꽃같이 날아오르는 불사조같이 부활한다. 죽은 뒤 자신의 주검에서 홀연히 다시 태어나는 새! 그렇게 일요일에 부활하는 게 우리 참모습이다. 일요일은 평온함이라는 날줄과 무심함이라는 씨줄을 엮어 짠 피륙이다. 그 피륙을 쫙 펴고 그 위에 누워 빈둥거려 보자. 우리는 일요일에 봉급을 받는 직장과 업무의 수고에서 놓여난다. 우리는 숯불 위에서 맨발로 춤추는 노예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러니 일요일마다 얻는 자유는 얼마나 감미로운가! 합법적으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자유를, 늦잠을 자고 한낮에는 맥주를 마시며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를, 야외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앙리 미쇼의 시집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서교동의 카페들을 기웃거릴 수 있는 자유를, 망원동 너머 한강으로 나가 해질녘 노을빛에 물든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를,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일요일의 시간들은 온전하게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배역이 평일과 일요일에는 확연하게 다르다. 평일의 우리는 보조역이거나 단역이다. 기껏해야 잠깐 얼굴을 내밀고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카메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다. 만물이 햇빛 아래서 빛나는 일요일마다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 받고 감히 우리를 적대하는 세상과 맞서고, 잡다하고 하찮은 일 속에 파묻혀 거의 닳아서 사라지는 자아를 되살려내고, 머리 위로 떠오른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는다.

인류는 일요일에 자유와 기쁨의 동맹을 맺고 쉰다. 일요일에도 일하는 자들은 일에 중독된 불행한 사람이거나 파렴치한 악인들임에 분명하다. 일요일의 자유를, 일요일의 행복을 걷어찰 정도로 중요한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굳이 일요일에 하는 일들은 월요일에 해도 될 일이다. “일요일이 지닌 두드러진 점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느림과 감속이라는 특성이다.”(장 프랑수아 뒤발) 우리는 일요일에 심심함이라는 고치 속에 머물고, 심오한 진리의 사색 속에 완고하게 매달린다. 종일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김연수나 김영하의 소설을 한가롭게 읽을 수도 있다. 우물쭈물하지 마라, 일요일은 빠르게 지나가버리니. 일요일은 속이 꽉 찬 꽃게다. 꽃게 속살을 파먹듯이 일요일의 안쪽을 알뜰하게 파먹으며 보내는 사람은 복되도다! 잘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누구나 일요일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려야 한다!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