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열쇠 수리공에게 正義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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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3
서민들 돈 빌려 파산신청하는 사람들오래전, 변호사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지인으로부터 금고를 선물 받았다. 그 금고는 비밀번호를 네 번 좌우로 정확히 맞춰야 열 수 있고, 큰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보호될 수 있는 방화벽 안전장치가 되어 있기에 중요한 서류들은 모두 거기에 넣어 두고 요긴하게 사용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사무실 정리 작업을 하면서 비밀번호를 적어둔 서류가 분실되는 바람에 열쇠 전문 수리공을 불러 금고를 열어 달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제도 악용하는 자들 가려 철퇴 가해야
위철환 < 대한변호사협회장 welawyer@hanmail.net >
전화를 받고 찾아온 수리공은 신통하게도 네 자리 번호와 좌우 횟수를 정확하게 알아냈다. 내가 그 신통방통한 열쇠수리공에게 감탄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그는 침울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최근 들어 파산, 면책 신청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절차가 끝나면 빚을 안 갚아도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열쇠 수리해 가면서 근근이 몇 푼씩 모아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람은 외국 여행도 다니면서 호사스럽게 살고 있어요.” 우울한 그의 기색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소연을 듣다 보니, 분개할 만하여 즉석 법률상담을 해주었다. 돈을 빌려갈 때는 꽤 사업도 잘하는 것 같았고, 상당기간 이자도 꼬박꼬박 잘 갚아주었는데 최근 들어 사업도 엉망이고 자신 앞으로 재산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빚을 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사안을 종합해 볼 때 형사책임을 묻기는 어렵고, 민사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으나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 파산·면책의 요건도 갖췄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도덕적 해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달리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에게 파산·면책 요건이 충족되어 법원이 이를 인정하게 되면 빚이 탕감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세상에 그런 것도 법이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제도의 취지를 설명해주었지만 그는 수긍하지 못했다. 국민의 법 감정과 현재의 제도 사이에 간극이 있어 구체적 정의 실현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사법적 정의가 무엇인지 단언키는 어렵지만, 적어도 파산제도를 악용하여 일신의 안위를 꾀하는 자들에게는 철퇴를 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수리공의 정의 관념이 새롭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위철환 < 대한변호사협회장 welawyer@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