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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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흐루시초프는 회고록에서 “북한의 남침 계획은 김일성 정권 수립과 때를 같이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3자의 긴밀한 협의 하에 추진됐다”고 밝혔다. 남침 사실을 감추려던 소련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 놀랍게도 서기장의 회고록이었다니 실로 아이러니컬하다.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할데만은 “1969년 북한이 미 전자첩보기를 격추했을 때 키신저 안보보좌관이 핵폭탄 보복을 제안했고, 닉슨이 이를 거절했다”며 당시의 비화를 털어놨다. 이 바람에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 원고를 급히 고쳐써야 했다. 클린턴 1기 노동부 장관 로버트 라이시는 “클린턴의 귀가 너무 얇아 주요 정책 결정은 힐러리가 주로 내렸다”고 썼다. 여자와의 염문이 많기는 했지만 엄처시하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회고록의 목적이 ‘폭로’만은 아니다. 철저한 금욕으로 존경받은 인도의 간디는 부인과 잠자리를 갖느라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회고록은 감추고 싶은 것까지 기록해야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그런 점에서 국내 정치인들의 회고록은 C급이다. 각색이 많고 사실과 다른 주장도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는 출생 고백으로 정직성을 부각시키려 했지만 정치자금 문제 등에선 ‘작은 진실로 큰 거짓을 가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치적 자랑에 열중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자금을 변명하느라 허둥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미완에 그쳤다. 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은 아직 준비 중이다. 정작 관심의 초점인 김종필 전 총리는 몇 번이나 안 쓰겠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츠 전 미 국방장관의 회고록이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혹평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정신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호평했다. 2011년 6월까지 모셨던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형편없는 전쟁 리더십을 보여준 의지박약자”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너무 솔직하게 쓰면 욕을 먹고, 그렇지 않으면 선택적 기억력이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공인의 회고록은 ‘역사 법정의 최후 진술’과 같다. 처칠이나 드골의 회고록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저명한 전문 필자들이 대신 써주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