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한류, 연 수주 1000억弗 시대 열자] 시공만 뛰어난 '반쪽 강자'…설계·기획력 키워야 '세계 제패'

(中) 글로벌 특화기술로 공략하라

대림산업, 플랜트 '한우물'…화학·정유 '정상급'
필리핀 신뢰 구축…석유공장 입찰 없이 수의계약
광건티앤씨 등 중소업체도 전문성 살리기 박차
필리핀 바탄주 리마이에 있는 대림산업의 ‘페트론 리파이너리 마스터플랜 2단계’(RMP-2) 현장. 석유화학 플랜트를 특화한 대림산업은 발주처로부터 우수한 시공력을 인정받아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프로젝트를 맡았다. 필리핀 리마이=이현진기자
한국 건설업체의 시공 경쟁력(한국건설기술연구원 자료 기준)은 세계 4위다. 미국 스페인 독일에 이어 세계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에서는 인도 중국 등에 밀려 5위고 설계 경쟁력은 19위에 그친다. 설계(토목·건축·플랜트 설계)와 건설사업관리, 사업기획 등 소프트웨어 분야 경쟁력이 매우 취약하다. 건설용역 수익률의 경우 시공보다 설계·기획 분야가 휠씬 높다.

국내 건설산업의 해외경쟁력을 지금보다 한 차원 높이고, ‘연 1000억달러 수주 시대’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설계·기획·관리 분야 기술력을 확실히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건설사별로 차별화된 ‘전문 기술력’과 ‘공사 종류별 강점’을 갖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를 토대로 공사 수주도 ‘선택과 집중’의 ‘심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150㎞가량 떨어진 바탄주 리마이 ‘페트론 리파이너리(정제공장) 마스터플랜 2단계’(RMP-2) 현장. 필리핀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연휴인데도 들뜬 분위기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이, 주·야간 2교대로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유재호 대림산업 현장소장(상무)은 “1년 중 3분의 2인 250일가량 비가 내리는 탓에 근로자들이 우비를 입고 일해야 하는 등 불편함이 적지 않다”면서도 “태풍이 불어닥친 때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현장이 멈춰선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림산업은 2011년 11월, 공사비만 20억달러에 이르는 이 대형 프로젝트를 필리핀 최대 정유회사인 페트론으로부터 수주했다. 낡은 정유공장을 축구장 52개 넓이와 맞먹는 37만여㎡ 부지에 현대식 설비로 신·증설하는 사업이다.
“독자적 기술과 신뢰로 수의계약”

대림산업은 해외 진출 이후 50여년간 플랜트사업에 역량을 집중해왔다.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처럼 일관된 전략은 주요 발주처에 ‘유화·발전 플랜트=대림산업’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RMP-2 프로젝트는 대림산업에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업체가 수주한 프로젝트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공장시설의 설계부터 자재구매·시공(EPC)까지를 모두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 사업기획 단계부터 지원을 해줬다. 일종의 ‘종합 디벨로퍼(개발사업)’ 입장에서 일감을 확보했다는 게 기존 플랜트 공사 수주와 차별화된 점이다.

대림산업은 정유공장을 최적의 효율로 가동할 수 있도록 여러 특허기술을 통합하는 ‘프로세스 통합서비스’와 기본설계 등 ‘EPC 선행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EPC 선행작업은 높은 기술진입 장벽 때문에 미국과 일본 등 일부 국가의 업체가 독점해왔다. 부가가치가 높지만 한국 건설업체엔 그동안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20억달러에 이르는 필리핀 국책 프로젝트를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따냈다는 것은 대림산업의 ‘실력’과 ‘신뢰’가 업계에서 널리 공인받았다는 방증이다. 발주처인 페트론은 대림산업이 필리핀에서 수행한 ‘페트론 FCC’ ‘페트론 BTX’ 등 정유 플랜트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공한 점을 높이 샀다. 경쟁사들이 제시한 32개월의 공사 기간을 24개월로 무려 8개월이나 단축한 것이다. 해외 수주 96%, ‘한 우물’ 플랜트

대림산업이 해외 건설시장에서 안정적인 성장세를 구가하는 이유는 플랜트라는 한 우물을 팠기 때문이다. 1973년 사우디 아람코사가 발주한 정유공장 보일러 설치공사를 16만달러에 수주한 게 국내 건설업체의 ‘해외 플랜트 수출 1호’다. ‘플랜트시장의 메이저리그’ 격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림산업은 ‘키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92년부터는 동남아시아에 진출, 다른 건설사들이 도로·제방·빌딩 등 건축과 토목에 치중할 때도 플랜트사업에만 집중했다. 작년 대림산업의 해외 수주 5조8000억원 중 플랜트 분야가 5조5000억원으로 96%를 차지한다.

김우재 대림산업 마닐라지사장은 “현지 업체와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도로공사 등 단순 공사는 저가 수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부가가치가 높고 상대적으로 블루오션인 플랜트에 처음부터 집중했던 게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중소업체도 전문성 살려 속속 해외로

대형 건설사만 강점을 특화시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아니다. 중견 건설사와 전문 건설업체도 전문성을 무기로 해외에 나가고 있다. 대부분은 대형사가 수주받은 공사의 하청업체로 시작하지만 직접 수주를 받아 진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광건티앤씨는 빌딩·산업용 칸막이를 전문적으로 생산·시공하는 업체다. 지난해 11월 베트남에서 삼성전자 옌빈 무선공장 신축공사의 클린룸 시공을 맡아 해외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테리어업체 이웨이는 현대건설이 카타르에서 짓는 하마드 메디컬시티 병원의 의장·도장·천장공사 등을 담당했다. 신라호텔, 베스트웨스틴호텔 등 국내 유명 호텔의 객실 인테리어 설계 능력을 인정받아서다. 김석화 해외건설협회 건설플랜트지원실장은 “중소업체들도 전문 영역을 특화하면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전문건설사도 하청 대신 직접 수주가 가능하도록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리마이=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