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용·저효율 구조가 만든 'IMF 위기'…뼈아픈 정부실패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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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18) 1997년 한국 외환위기
높은 임금상승률과 노사갈등…채산성 악화로 적자기업 속출
금융기관 부실화까지 이어져 국가파산 IMF 외환위기 발생
환율 달러당 2000원 대 돌파…금리 30% 까지 웃돌아
국민참여 금 모으기 실시
정부의 규제 여전히 많아 한국 경제 위기는 현재 진행형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1997년 이른바 ‘외환위기’ 때 나라의 빚을 갚자며 온 국민이 금모으기를 할 때의 장면이다. ‘나라사랑 금모으기 캠페인’에 참여한 국민은 350만명이나 됐고, 이 캠페인을 통해 3개월간 모인 금이 무려 227t, 금액으로는 20억달러어치였다. 이때 나왔던 구호 중 하나는 ‘장롱 속의 금 모아 나라경제 되살리자’였다. 경제 회생을 위해 온 국민이 발 벗고 나선 결과 3년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이 1997년 경제위기를 맞은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한국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구조적인 문제가 경제위기를 촉발했거나, 최소한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본다.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한국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정부가 호언장담했지만, 사실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물론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한국은 IMF나 세계의 신용평가기관에서 그 어떤 위험 경고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정부가 경제의 기초가 건실하다며 안이하게 대처했던 원인으로 보인다. 통화와 재정정책도 비교적 건전하게 운용되고 있었다. 자본유입에 따라 해외부문에서 통화증발 요인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총통화증가율은 1990년대 후반 오히려 감소했다. 재정 역시 1993년 이후로 소폭이나마 흑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에 비해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높게 유지되고 있었고, 물가도 안정돼 있었다.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 관련 지표들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외환위기를 맞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국내총생산 대비 경상수지 적자가 8~10%였으나, 한국은 1995년 2.0%에서 1996년 4.7%로 증가했을 뿐이다. 외채 비중도 다른 나라들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위기를 겪은 건 1987년 이후 높은 임금상승과 노사갈등으로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고착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의 인위적인 성장정책과 시장개입으로 경제구조가 왜곡된 것도 원인이었다. 1990년대 중반 제조업 명목 임금상승률은 10%를 넘었다.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적자기업이 속출했다. 부도업체 수가 1996년 1만1589개에서 1997년에는 1만7168개로 늘었다.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 연쇄 도산은 부실채권을 증가시켜 금융회사 부실화를 불렀고, 금융회사 대외신인도는 떨어졌다. 종전엔 자동으로 이뤄지던 단기 외화차입금의 연장이 중단되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금리규제와 파산억제 정책들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김으로써 기업 부실을 키웠다. 또 주인이 없는 은행에 대한 규제와 관치금융은 은행이 상업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의해 운영되도록 만들었다. 은행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고, 신용평가에 의한 여신보다는 담보와 지급보증을 위주로 한 여신을 선호했다. 경쟁력도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