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귀신 같은 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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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80년대 후반 할리우드에선 레이더스(raiders·무장 침입자란 뜻)를 다룬 영화가 적지 않았다. ‘월스트리트’(1988년)의 주인공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 분)는 ‘탐욕은 좋은 것’이란 좌우명으로 산 실존인물이었다. ‘귀여운 여인’(1990년)의 로맨틱한 백만장자(리처드 기어 분)도 직업이 기업사냥꾼이다.
레이더스는 월가의 안티히어로다.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의 주식을 단기간에 사모은 뒤 경영진과 협상(?)을 통해 비싸게 되팔아 거액을 챙기는 식이다. 당시 루돌프 줄리아니 검사는 월가 범죄자들을 기소해 정치적 명성을 쌓고 1993년 뉴욕시장에 당선됐다. 월가의 M&A 전문가들이 모두 교도소 담장 위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여, 악명과 함께 명성을 쌓은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모펀드 KKR이다. 설립자인 제롬 콜버그, 헨리 크래비스, 조지 로버츠의 이니셜을 딴 KKR은 1976년 출범했다. 셋은 투자은행(IB) 베어스턴스에서 한 팀으로 일했고,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사촌간이다. 콜버그가 1987년 아들 문제로 인해 KKR을 떠났지만 이름은 그대로 쓴다.
KKR의 무기는 차입매수(LBO)다. 인수자금의 80~90%를 차입해 가능성 있는 기업을 산 뒤 가치를 높여 통상 5~7년 뒤 되파는 식이다. 연 평균 수익률이 20%에 달한다. 물론 부채 축소과정에서 구조조정으로 반발도 많아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경영효율과 기업 가치를 높이는 역량이 탁월해 ‘자본주의 정비공장’이란 평가도 듣는다.
KKR로 인해 원가의 역사가 바뀐 사건도 있다. 1989년 세계적인 식품·담배업체 RJR내비스코를 KKR이 무려 310억달러에 인수한 것. 이 M&A는 대형 IB들이 모두 참여해 ‘별들의 전쟁’으로 불렸고, 6개월간 반전을 거듭한 과정이 ‘문앞의 야만인들’이란 책에 잘 묘사돼 있다. KKR의 운용자산은 600억달러에 이르고, 아시아 투자펀드만도 60억달러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블랙스톤이 등장하면서 ‘세계 최대’ 타이틀을 넘겨줬고, 뉴욕증시 상장도 3년 뒤졌다. 때문에 KKR은 진작부터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4년 전 오비맥주를 18억달러에 샀던 KKR이 원주인인 AB인베브에 58억달러에 되팔아 관심을 모은다. 4조원 넘는 대박이 난 것은 오비맥주가 그동안 맥주시장 1위가 됐고, 부채를 대폭 줄인 덕이다. KKR의 안목과 노하우가 돋보인다. 토종 사모펀드들에게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 같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