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시대…점점 커지는 그들의 영향력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36) 큐레이터란 무엇인가?
사비나미술관의 강재현 큐레이터(왼쪽)가 관람객에게 전시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비나미술관 제공
지난해 10월 영국의 세계적인 미술매거진 ‘아트 리뷰’가 발표한 ‘세계 미술계 파워 인물 100인’ 명단을 보면 놀랍게도 큐레이터(curator)가 대거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1위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런던 서펜틴갤러리 큐레이터, 2위는 글렌 D 로리 뉴욕 근대미술관(MoMA) 관장, 3위는 니콜라스 세로타 영국 테이트미술관 총관장이 차지했다. 세계 최고의 갤러리 중 하나인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의 래리 가고시안 관장 역시 5위로 상위권에 랭크됐다. 이와는 달리 작가의 영향력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브루스 노먼이 10위로 최고이고 천문학적인 작품값을 자랑하는 데미안 허스트는 겨우 48위에 만족해야 했다.

이와 같은 기현상은 호경기에는 작가가 ‘갑’이지만 불경기에는 작가의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큐레이터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또 작품 제작 행위보다 작품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큐레이팅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큐레이터는 ‘보살핀다’ ‘관리한다’는 뜻의 라틴어 ‘큐라(cura·영어의 care)’에서 유래한 용어로 감독인, 관리인을 뜻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의 관리자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주된 업무는 소장품을 연구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장품의 구입, 보수, 관리 업무 등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시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의 기획은 단순히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종합적으로 내보여주거나 연대기적 혹은 나열식으로 제시하는 ‘백화점식’ 전시로부터 사회적 이슈나 병리현상을 취급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 사회와 제도의 변혁을 꾀하는 주제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1969년 스위스 출신의 전설적인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활동을 계기로 큐레이터의 사회적 역할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 속에서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고 동일한 현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제도와 사유의 틀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주제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사회학 등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깊이 있는 소양이 필수적이다. 서구 큐레이터들 대부분이 박사 또는 석사 학위 소지자라는 점은 전시기획자가 된다는 게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정한 설립 목적을 지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소속된 큐레이터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전시기획에 그대로 반영하기 어렵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독립큐레이터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큐레이터 중 상당수가 미술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독립큐레이터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으론 백남준처럼 작가가 큐레이터의 역할을 겸하는 ‘큐레이터 형’ 작가도 있다. 이들은 스스로 전시의 테마를 정하고 전시작품의 배치 계획까지 수립한 다음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미술관을 물색한다. 그러나 이렇게 미술관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작가는 소수의 1급 작가들뿐이다.

주제전은 다양한 작가를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작가 섭외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비엔날레처럼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동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평소 많은 작가에 관심을 갖고 친분을 유지해야만 자신이 원하는 이런 주제전을 꾸릴 수 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장소에 퍼져 있는 작품을 한데 모아야 하므로 작가 개인전보다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재원 조달 역시 큐레이터의 몫이다. 결국 오늘날의 큐레이터는 전방위 능력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

예전에 큐레이터는 작가의 숨은 조력자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이제는 작가가 그들에게 의존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지만 작가 없는 큐레이터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큐레이터의 역할이 중시된다 해도 미술의 최전선에서 관람객을 감동시키는 것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도 그들로부터 자극받고 영감을 얻는 수혜자의 한 사람이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 산다”(‘큐레이터 본색’ 중에서)고 한 말은 그 점에서 곱씹어봄 직하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