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유일한 "국민이 건강해야 나라를 찾는다"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내 소유 주식 전부를 사회에 환원한다.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떠난 이의 유언장이다. 기업인의 사표(師表)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처럼 완전체적인 삶을 살다 간 이가 또 있을까.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선생이다.

선생은 1895년 평양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전자회사 GE에 회계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선생의 관심은 월급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그를 위한 자금 마련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 선생과 함께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한 선생은 당시 재미 중국인들을 겨냥해 숙주나물 통조림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1926년 미국 최초의 동양인 여의사인 중국인 아내 호미리와 함께 22년 만에 귀국했다. “국민이 건강해야 나라를 되찾는다”는 생각으로 서울 종로에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결핵약에 이어 1933년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을 출시했다. 1938년 다시 도미,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엔 독립운동가로 적극 나섰다. 194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를 창설, 직접 특수요원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조국에 돌아와 다시 기업가로서 유한양행을 국내 2위의 제약사로 키웠다. 아들에게 잠시 부사장을 맡겼으나 미국으로 돌려보내고,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긴 뒤 1969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1971년 3월11일 눈을 감았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