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분단이 만든 '역사적 화약고'

크림반도의 갈등 배경은
우크라이나는 수도 키예프를 포함한 북서부 지역과 크림반도를 끼고 있는 동남부 지역 간 언어·문화 등의 차이가 뚜렷하다. 북서부는 주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친서방 성향이 강하다.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가 많은 동남부는 친러시아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런 차이는 우크라이나의 오랜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됐다. 우크라이나 슬라브족은 9세기 키예프 대공국을 세웠지만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국토가 나뉘어 폴란드와 러시아의 지배를 각각 받았다. 우크라이나가 다시 합쳐진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옛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된 이후다. 특히 크림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자치시로 이뤄진 크림반도는 1954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우호의 상징으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에 편입시키기 전까지도 소련 영토였다. 이곳의 인구 245만명 중 러시아인이 58.5%를 차지한다.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크림지역 의회가 이번 사태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던 이유에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러시아의 중재로 크림지역은 자치공화국으로 우크라이나에 남았으나 대신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을 장기 임차해 흑해함대를 주둔시켰다.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데다 부동항(不凍港)이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던 까닭이다. 최근 축출된 친러시아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0년 러시아와의 임대기간을 2042년으로 연장하는 협약을 맺었다.

크림반도는 지정학적 이점으로 19세기 중반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 간 크림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백의의 천사’로 불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터키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며 활약한 것도 이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정상들이 모여 전후 처리방안 등을 논의한 ‘얄타회담’도 크림반도에서 열렸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