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꽃구경 명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보슬비가 오거나, 안개가 짙거나, 바람이 거세도 날을 가리지 않는다. 빗속에 노니는 것은 꽃을 씻어주니 세화역(洗花役)이라 하고, 안개 속에 노니는 것은 꽃에 윤기를 더해주니 윤화역(潤花役)이라 하며, 바람 속에 노니는 것은 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하여 호화역(護花役)이라 한다.’

조선 후기 문신 권상신이 ‘남고춘약(南皐春約)’에 기록한 꽃놀이 규칙이다. 꽃구경 가자는데 날씨 핑계 대며 오지 않는 친구들을 낭만적으로 구슬린 것이다. 올해 개나리와 진달래는 지난해보다 열흘 정도 빨리 필 모양이다. 개화 절정기는 남녘 22일, 서울 4월 첫주라고 한다. 봄꽃 향기 중 으뜸이야 단연 매화다. 광양 청매실농원 일대 10만여 그루의 매화향이 벌써 섬진강 허리를 휘감고 돈다. ‘꽃절’로 불리는 선암사의 매향은 깊고도 그윽해서 옷자락에 금방 배어날 정도다. 인근의 금둔사 청매, 백매, 홍매 100여 그루도 눈부시다. 초봄 추위에 붉은 꽃잎을 앙다문 납월매가 일품이다. 양산 통도사 홍매화도 활짝 피었다.

‘남자한테 참 좋다’는 산수유는 지리산 자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축제(22~30일)가 열리는 구례군 산동면 일대와 인근 현천마을, 계척마을을 가득 덮었다. 경북 의성과 경기 이천도 산수유가 많이 피는 곳이다.

벚꽃은 예년보다 조금 늦어 이달 27일께 서귀포에서 피고 육지에서는 4월 8~18일께 만개한다고 한다. 하동 쌍계사 십리벚꽃길과 벚꽃도시인 진해, 대전·청주 무심천변, 강릉 경포대와 춘천, 영암 등이 명소다. 서울 주변의 여의도 방죽길, 삼청공원, 중랑천, 뚝섬 서울숲, 양재천, 일산 호수공원, 인천 수봉공원, 월미공원도 그렇다. 동백은 이달 말이 절정인데 여수 오동도 동백이 반쯤 익었다. 강진 백련사 동백숲은 정약용의 다산초당 초입에 있어 애잔하다. 섬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은 거제 지심도, ‘별에서 온 그대’ 촬영지인 통영 장사도에도 동백꽃이 지천으로 핀다. 선운사 동백은 미당의 시구처럼 가장 늦게 피어 4월에나 볼 수 있다.

꽃은 언제 봐도 새롭다. 님소식은 들쭉날쭉해도 꽃소식은 일정하다. 봄마다 터지는 꽃봉오리에 마음이 붉어지고 온몸에 꽃물이 든다. 꽃밭을 거닐다가 소매 가득 향기를 안고 돌아온다는 서거정의 시구와도 닮았다. 김홍도는 그림 판 돈 30냥을 주고 매화 화분을 샀다는데 요즘 돈으로 150만원이니 비싸다. 봄부터 가을까지 피는 꽃들을 앞뒤마당에 심어놓고 계절마다 호사를 누리는 꿈이야 돈도 들지 않으련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