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 '부실 공포'…대기업 계열 회사채값 급락

신평사, 채권 발행기업 펀더멘털만 집중
'AA급' CJ대한통운 보증에도 500억 못채워
KT ENS의 전격적인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을 계기로 일부 채권값이 급락하는 등 후폭풍이 일고 있다. 최우량 모기업을 둔 회사 채권도 순식간에 부실채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된 때문이다. 우량 회사채 발행시장의 인기에도 ‘찬물’을 끼얹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3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KT ENS가 지난 12일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이후 KT 포스코 SK LG 등 대기업그룹 계열 비우량 회사들이 발행 또는 보증한 채권의 유통수익률이 최대 1%포인트까지 급등(채권값 급락)했다. 포스코 자회사 포스코플랜텍이 보증해 지난달 26일 발행된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미라클제일차)는 19일 연 5.5~6.5%의 수익률로 35억원어치 거래됐다.

KT ENS 법정관리 신청 여파…회사채 시장 요동

'모기업 지원' 프리미엄 실종…우량 계열사 돈줄도 꼬인다이 채권은 발행 후 이달 12일까지 연 5.0~5.3%에 거래되다 1주일 새 최대 1.2%포인트 급등했다.

SK건설이 보증한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징코트리제일차)도 지난달 연 4.65~4.70%에 매매됐으나 지난 18일엔 약 500억원어치가 연 5.60~5.70% 수익률에 유통됐다.

KT캐피탈이 직접 발행한 ‘46-2호 회사채’는 5일 민평수익률(채권평가사들이 평가한 수익률 평균) 대비 0.01%포인트 가산한 금리로 거래됐지만, 18일엔 가산금리가 0.08%포인트로 높아졌다. KT ENS의 법정관리 신청 뒤 KT 계열사 회사채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결과로 시장에선 풀이했다. 이달 3일 민평금리+0.05%포인트로 유통된 LG실트론 회사채(35회)는 지난 13일 가산금리가 0.10%포인트로 높아졌다. 이처럼 우량그룹 소속 비우량 계열사 채권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형 증권사 투자은행(IB)사업부 관계자는 “KT ENS 사태는 국내 최고 신용등급 회사도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지 않고 법정관리로 보내는, 이른바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초유의 사건”이라며 파장을 걱정했다.

시중금리가 점차 상승할 것이란 관측이 많은 시점에서 ‘우량 모기업 프리미엄’마저 사라져 대기업 계열 비우량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이 급증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박정호 동부증권 연구원은 “앞으론 기관과 애널리스트들은 채권 발행기업의 자체 펀더멘털 분석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라며 “주력 계열사 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일부 그룹의 계열사들은 모회사 지원 여력에 대해 더욱 보수적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미 모기업 지원 가능성 전반에 대해 재검토에 들어갔다. 신평사 관계자는 “아직 공표할 수준은 아니지만 계열 지원 가능성을 새로 평가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KT처럼 ‘꼬리 자르기’ 선례가 있는 그룹의 계열사들은 앞으로 독자신용등급, 즉 계열사 지원 가능성을 배제한 등급에 가깝게 등급을 부과할 것 같다”고 했다. 우량회사채 발행 및 유통시장에도 부정적 여파가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복합물류가 CJ대한통운(AA-) 보증으로 5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지난 14일 실시한 수요예측에 300억원의 유효수요만 참여했다. 올 들어 AA급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모집금액을 채우지 못한 첫 사례다.

해운·건설·항공·철강·조선 등 업황이 좋지 않은 기업들의 회사채는 투자자들로부터 더욱 외면받을 공산이 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SK 등 4대그룹 내 건설·해운 계열사와 대한항공 두산 동부 동국제강 코오롱 한라그룹 등 취약업종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이 더욱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KT가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시장 전체가 큰 악재를 만나게 됐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KT ENS 관련 유동화증권을 판매했던 한 증권사 관계자는 “KT는 ‘푼돈’ 아끼려다 계열사의 신뢰 상실과 자금조달비용 상승을 초래한 것은 물론, 국내 회사채 시장의 안정성을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 12일 KT와 주요 계열사 5곳의 신용등급을 모두 ‘부정적 검토’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태호/이상열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