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포템킨과 푸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787년 어느 날 러시아 여제(女帝) 예카테리나 2세가 배를 타고 새 합병지인 크림반도 시찰에 나섰다. 그 지역 총독인 그레고리 포템킨은 가난한 마을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영화 세트 같은 가짜 마을을 급조했다. 배가 지나가면 세트를 해체해 다음 지역에 또 갖다 세웠다. 이 웃지 못할 촌극에서 생겨난 말이 ‘포템킨 빌리지’인데, 전시행정을 비꼬는 용어가 됐다. 추한 현실과는 딴판인 가공의 장면을 연출해 현실을 호도한다는 의미다. 이미 학술 용어로 굳었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을까. 포템킨은 여제의 연인이 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 사령부를 둔 러시아 흑해함대도 그가 창설했다. 영화로 더 유명한 ‘전함 포템킨’이 그의 이름을 땄으니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러시아에는 ‘저 사람 뒤에는 엄청나게 큰 게 있다는 환상을 남에게 심어주고 그 환상을 적절히 활용하라’는 처세술이 있다고 한다. 미국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이를 포템키니즘(환상 이용 기만술)이라고 불렀다. 이 수법의 달인으로는 옛 소련의 흐루쇼프가 꼽힌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줬던 그는 냉전 시절 엄청난 미사일을 보유한 것처럼 허풍을 떨어 미국의 기를 죽였다. 그의 증손녀가 최근 “푸틴이 스탈린이 돼 간다”고 비판했는데 이런 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포템킨이 죽은 지 220여년이 흐른 지금도 러시아에는 가짜 세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푸틴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는 세트다. 몇 년 전 총리 시절부터 그가 지역을 순회할 때마다 ‘의문의 잔디’가 등장했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곳에 깔린 잔디가 곧 통째로 없어지기에 모두들 ‘포템킨 잔디’라고 불렀다. 젊은이들은 아예 “러시아 전체가 ‘포템킨 마을’ 같다”며 주먹감자를 날린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21세기 차르(황제)’를 꿈꾸는 푸틴이 ‘포템킨 인기’에 빠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엊그제 모건스탠리의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경제 상황을 언급하면서 ‘포템킨 경제’라는 말을 썼다. 속은 썩고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얘기다. 이 말은 옛 소련 해체 후 폴 크루그먼 등이 자주 사용해서 경제용어로 자리 잡았다. 지난 7년간 연평균 7%씩 성장하던 러시아 경제가 푸틴이 재집권한 지난해 1.3%로 추락했으니 이른바 ‘푸티노믹스’가 ‘포템키노믹스’와 동의어가 돼 가고 있다. 게다가 크림 사태 이후 외국 자본까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