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손성원 교수 "한국은 지금 스태그네이션…규제 풀고 혁신 토양 만들어야"

'미래경제' 출간한 손성원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

외국인 마음껏 투자할 수 있게 '윔블던 효과' 누려야 진정한 창조경제
아베노믹스 최대 피해자 한국, 원화 평가절하 필요
美 금융위기 상처 안 아물어…2015년 봄 금리인상 가능성 희박
中 성장둔화·美 양적완화 축소, 신흥국 경제 '전환점'될 것
손성원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는 “경제를 하루아침에 바꿔놓는 마술지팡이는 없다”며 “정부는 기업이 마음 놓고 혁신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스뱅크 제공
“한국도 지금 세계 경제에 닥친 ‘스태그네이션(장기 경기침체)’이라는 큰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이 파도를 이기려면 창조경제와 연구개발(R&D)을 확대해 성장동력을 키워야 하는데 한국엔 ‘윔블던 효과’가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영국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주로 입상하지만 덕분에 대회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외국인들까지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최고의 경제전문가로 손꼽히는 손성원 미국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는 최근 펴낸 ‘미래경제(New Economy)’라는 책(사진)에서 이같이 조언했다. 손 교수는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성장 둔화, 엔저를 앞세운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기부양책)’, 미국의 금융긴축 등이 한국 경제에 역풍을 몰고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손 교수에게 글로벌 경제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들어봤다.

▷왜 지금이 스태그네이션인가.

“5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경기침체는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린다. 1847년 철도 주식 폭락, 1907년 금융 패닉, 1929년의 대공황이 대표적이다. 미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5분기 연속 총 8.9%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대공황 이후 가장 긴 침체였다. 세계 경제는 또 생산성 둔화와 노동력 감소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 내 정치권 대결, 중동사태, 중·일 영토 분쟁과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등 세계 정치와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금융위기가 일반적인 경기후퇴보다 무섭다는 뜻인가.

“재고 급증이나 오일 쇼크 등에서 촉발된 경기침체는 그 문제만 해결되면 쉽게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은 경제의 ‘피’다. 피에 문제가 생기면 금방 치료되지 않는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주택시장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수백여개의 상업은행이 도산했다. 제너널모터스(GM) AIG 같은 대기업이 파산위기에 직면해 구제금융을 받았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위기는 극복했다. 미국은 금융위기 때 매를 가장 먼저 맞았고 은행 부실도 가장 빨리 털었다. 셰일가스 개발 등 에너지 붐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제조업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해외로 나갔던 제조업의 리쇼어링(국내 귀환)도 잇따르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점도 유리하다. 2050년 미국의 평균 연령은 40세로 예상되지만 중국은 49세, 일본은 52세에 이를 전망이다.”

▷Fed가 내년 4월 금리를 인상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는데.

“재닛 옐런 의장의 ‘양적완화 종료 6개월 뒤’라는 발언 탓이었다. 옐런의 말 실수로 봐야 한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금리 인상 시기를 말한 적이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내년 봄 금리 인상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금융위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 경기는 여전히 침체 국면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더라도 천천히 올릴 것이며 신흥국에 미치는 여파도 1997~1998년 외환위기 때와 같은 큰 충격은 아닐 것이다.” ▷금리 인상이 늦어지면 인플레이션이나 자산 거품 우려는 없나.

“Fed가 돈을 많이 풀어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우려인데, 통화량도 중요하지만 화폐 유통속도(회전율)를 함께 봐야 한다. 유동성은 늘어났지만 화폐 회전율은 줄었다.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에 적극 나서지 않고 현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물가지수(CPI)에 반영되는 임금 비중은 60%다. 높은 실업률로 인해 임금 인상 압력도 낮다. 선진국은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더 큰 걱정이다.”

▷요즘은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최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수년간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본다. 우선 부동산에 거품이 생겼다. 정부가 붙잡고 있어 터지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문제가 될 것이다. 1조7000억달러에 달하는 지방정부의 부채도 골칫거리다. 중국 정부는 설비투자와 수출 중심의 성장전략에서 교육 건강 사회복지를 강조하면서 성장 목표치를 7.5%로 낮췄다. 세계는 더 이상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값싼 자본, 그리고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기 힘들다.”

▷중국은 신흥국의 ‘대장’이었다. 신흥국도 시들해지는가.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이 글로벌 성장을 주도했다. 중국의 원자재 수입 증가와 선진국의 양적완화 등으로 글로벌 자금이 신흥국에 대거 유입됐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원동력이 사라지면서 신흥국 경제는 이른바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했다. ‘선진국 부진-신흥국 약진’이라는 기존 흐름이 반대로 움직일 것이다. 사실 신흥국은 이전부터 펀더멘털(경제 기초체력)이 튼튼하지 않았다. 경상수지 적자 등 구조적 문제점이 양적완화 효과에 가려져 있었고 구조개혁을 하지 않았다.”

▷일본 ‘아베노믹스’는 어떻게 평가하나.

“성장률이 오르고 물가 하락 추세가 멈춘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속 가능 여부다. 최근의 물가 상승은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가 오른 영향이 컸다. 장기적으로 임금이 올라야 하는데 일부 대기업만 동참하고 중소기업은 그렇지 못하다. 20년간 지속된 디플레 정서는 중앙은행이 돈을 푼다고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여성 고용 확대, 규제개혁 등 성장동력 기반을 마련하는 ‘세 번째 화살’이 더 중요한데 이 역시 결코 간단치 않다.”

▷아베노믹스 최대 피해자를 왜 한국이라고 보는가.

“일본과 한국 모두 무역에 크게 의존한다. 경쟁하는 품목도 자동차 조선 가전 등으로 비슷하다. 엔화가 평가절하되면 한국은 가만히 앉아서 피해를 본다. 한국 원화는 달러화 대비 적정 수준이지만 엔화에 대해선 상당히 고평가돼 있다. 한국 정책당국은 원화가치를 낮추는(환율 상승)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스태그네이션 시대에는 정부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는데.

“한국을 보자. 지금까지 조선 자동차 정보기술(IT) 화학으로 먹고 살았는데 이제 10~20년 뒤에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정부가 창조경제와 혁신을 강조하는데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경제를 하루아침에 바꿔놓는 ‘마술지팡이’는 없다. 정부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태양열 에너지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 집중 육성하다 혈세만 수백억달러를 낭비했다. 정부는 규제를 풀어 기업이 맘 놓고 혁신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한국은 창의성과 독창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부족한데 이를 해외에서 가져올 생각도 해야 한다. 실리콘 밸리처럼 ‘윔블던 효과’ 없이는 창조경제가 성공하기 어렵다.”

▷스태그네이션 이유 중 하나로 꼽은 중소기업 대출 기피는 한국에서도 심각하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 은행들은 돈이 남아돌 정도로 자산건전성이 개선됐지만 중소기업은 대출받기가 매우 어렵다. 신용은 경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혈맥’인데 신용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 금융위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은행들은 예대마진 영업보다 돈을 떼일 우려가 없는 수수료(fee) 영업에 더 치중하고 있다. 웰스파고은행은 요즘 수익의 50% 이상이 수수료 수입에서 나온다. 수수료 수입이 많은 대기업과 거래하려는 경향이 더 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중소기업은 고용의 50%, 경제성장의 40%를 차지한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경제성장을 더디게 할 것이다.”

■ 손성원 교수는

손성원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69)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이코노미스트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주립대와 하버드대 MBA를 졸업했으며 피츠버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미국 중앙은행(Fed) 애널리스트를 거쳐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수석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다. 이후 30년간 웰스파고은행에 근무하면서 정확한 경제전망으로 명성을 얻어 수석부행장까지 올랐다. 2005년 LA한미은행장을 지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매년 선정하는 경제전문가 순위에서 2006년 1위, 2011년에는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