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최다 출전한 '빙속 전설' 이규혁…7일 은퇴식 "난 '날라리' 선수…그래서 오래 달릴 수 있었죠"

20년간 6차례 올림픽 도전했지만 '무관의 제왕'
이상화는 당돌한 후배…큰 시합마다 멘탈 조언
7일 은퇴하는 ‘빙속 전설’ 이규혁이 서울 보문동 자택에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때 신었던 스케이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만수 기자
2010년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레이스를 마친 이규혁(36)은 빙판 위에 풀썩 쓰러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던 그는 조명이 다 꺼지고 나서야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이규혁은 “안 되는 걸 도전하려는 게 힘들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한국 최고 선수로 세계신기록까지 세웠지만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다섯 번째 도전에서도 메달을 따지 못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규혁은 다시 일어섰다. 만 36세 나이에 여섯번째(2014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얻었다. 한국선수 중 올림픽 최다 출전 기록이다. 강산은 두 번 바뀌어 메달을 경쟁하던 선수들은 코치, 감독으로 러시아에 왔지만 그는 다시 1000m 경기 출발선에 섰다. 이규혁은 최종 순위 21위로 총 592회의 레이스를 마쳤다.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은 그의 끝없는 도전과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7일 은퇴식과 자서전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의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규혁을 서울 보문동 자택에서 만났다. ▷은퇴를 밝인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30년 가까이 선수생활을 하다보니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평생을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였는데 자유롭게 움직이려니 잘 안된다. 일찍 일어나 운동 준비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요즘엔 그동안 소홀했던 공부에 시간을 쏟고 있다. 석사(고려대 체육교육대학원) 졸업 준비가 최우선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은퇴식 준비로도 바쁘다. 지인들과 만나서 못다한 얘기들을 하며 술도 한잔 하고 싶은데 시간이 잘 나지 않는다(웃음).”
▷20년 동안 올림픽에 여섯 번 출전했는데 결국 메달을 못 땄다. “4년 전부터 체력적인 한계가 왔지만 올림픽 메달이 뭔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데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세계신기록도 세우고 다른 대회에선 성적이 좋았는데 올림픽만 나가면 그 기록이 안 나와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다음엔 꼭 딸 수 있다. 한 번쯤은 나에게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올림픽에 나서다보니 어느덧 여섯 번째 출전이 됐다. 메달 욕심이 과해 못 딴 것 같다. 정신적으로 관리를 잘 못했다. 이젠 미련을 버렸다. 메달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 같다.”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나는 ‘날라리’ 운동선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올림픽에 나간 게 사춘기(16살) 때 였는데, 그 무렵부터 운동만 했다면 정신적으로 지쳤을 거다. 어릴 땐 반항도 많이 했고 선배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나이트클럽도 많이 다녔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운동에 재미를 느꼈다. 어렸을 땐 내가 2014년까지 운동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990년대 후반과 36세 때의 훈련량이 비슷했다. 나이를 먹은 뒤엔 운동을 더 하고 싶어도 체력이 소화해내질 못했다.” ▷이상화(25)에겐 어떤 선배였나.

“상화는 여러모로 나랑 비슷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태릉선수촌에 들어온 것부터 비슷하다. 어린 선수들은 선배가 무섭게 느껴지고 어려울 텐데 상화는 편안하게 대하고 당돌하게 행동한다. 스케이트에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강하다. 그런 점이 나와 비슷하다. ‘여기서 오래 생활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상화에게는 스케이트 기술보다 큰 시합에 나설 때의 마음가짐, 이미지트레이닝 등 정신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많이 해줬다. 후배들에게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상화에겐 내 모든 걸 줬다. 지금은 상화가 나보다 대회 성적이 좋으니 더 할 말이 없다.”

▷가수 싸이, 서장훈 선수와도 친분이 깊다고 들었다. “내 주변엔 날라리들이 많다(웃음). 물론 자기 분야에선 지기 싫어하고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재상이형(싸이의 본명)은 데뷔할 때부터 친했다. 직간접적으로 많은 힘이 되는 형이다. 늘 응원한다고 얘기해주고. 형은 신곡이 나오기 전에 먼저 들려주고 피드백을 얻기도 한다. 장훈이형은 선수촌에서 알게 됐다. 덩치만 큰 선수 같지만 현명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유명세를 얻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상의한다. 제갈성렬 전 스피드스케이팅 감독도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다.”

▷한국 동계스포츠의 위상은 1994년 릴레함메르 때와 어떻게 달라졌나.

“당시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위상이 커졌다. 쇼트트랙이 먼저 인기를 끌었지만 스피드스케이팅이 더 전통 있는 스포츠다. 기록경기이고 정직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그걸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필요한 게 메달이었다. 이상화와 모태범 같은 후배들이 역할을 해줘서 고맙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하나의 진로를 정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국제심판이나 코치, 아니면 해설위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스피드스케이팅의 범주 안에 있고 싶다. 운동선수들은 그동안 운동만 잘했지 행정적, 이론적으로는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다보니 비전문가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선수 출신이지만 노력하면 이론적으로도 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