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독일 제품이 신뢰를 얻는 이유

예외적 상황까지 감안한 검증절차
개별 부품은 물론 완제품도 테스트
기술력에 신뢰를 얹힐 수 있어야

유지수 < 국민대 총장·경영학 jisoo@kookmin.ac.kr >
독일 기업들은 남다른 신제품 개발프로세스를 채택하고 있다. ‘엑스 인 더 루프(x-in-the loop)’로 총칭되는 프로세스다. 이 프로세스는 제품 개발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동시에 신뢰성과 가격경쟁력도 높여주는 장점이 있다. ‘엑스’는 개발한 부품을 말하며, ‘루프’는 제품·사용자·사용환경처럼 새로 개발한 부품과 연계된 상황을 의미한다.

한국의 부품기업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사가 개발한 부품의 신뢰성을 자체 검증만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이 부품이 완제품에 장착됐을 때와 사용자의 다양한 사용습관, 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검증은 매우 취약한 편이다. 부품 자체에 대한 검증은 철저하지만 이 부품이 완제품에 들어가고, 사용자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파악할 수 없는 셈이다. 휴대폰으로 치면 조그만 칩에 대한 검증과 함께 완제품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용자가 매우 습하고 온도가 높은 환경에서 일할 수도 있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집어던질 수 있는 상황까지 감안해 그 신뢰도를 검증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용 환경에 따라 그 어떤 치명적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제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 만난 유럽의 한 검증전문회사는 독일 자동차회사가 의뢰한 에어백 검증작업을 하고 있었다. 운전자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가 났을 때를 가정해 에어백이 얼마나 빨리 터져야 운전자가 안전한가를 검증하는 일이었다. 아주 예외적인 상황(루프)까지 모두 사전에 검증하는 이런 프로세스가 바로 ‘엑스 인 더 루프’인 것이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기술은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은 가상공간에서의 경쟁도구다. 독일과 같은 선진국은 자동차·전자·화학회사 등에서 신제품 개발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가상공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가상공간에서 검증한 데이터는 매우 요긴하게 사용된다. 실제 상황에서 검증한 데이터와 가상공간에서 검증한 데이터를 비교해 일치하는가를 확인한다. 독일은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모두 동원해 검증의 철저화를 기하는 것이다. 이런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포함한 통합 검증이 독일 제품을 우수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이다.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기업이 어떻게 새로운 경쟁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가격경쟁이라는 구(舊)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부가가치 경쟁이라는 신(新)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한 경쟁 패러다임은 기술력에 기초를 둬야 한다. 임금상승에 따른 압박감이 점점 기업을 위축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획기적인 원가절감을 꾀해야 한다. 독일 기업도 예전의 우리와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었다. 이를 제품개발 기간의 단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획기적으로 원가를 절감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임금상승 억제를 외치고, 근로시간 단축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소귀에 경 읽기가 된 지 오래다. 국회와 정치권은 각자 자기이익에 매몰돼 있을 뿐이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가 됐다. 그러니 기업도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 많은 기업인, 특히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해외 이전을 고려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국내 제조기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애국심에 호소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조와 연구개발(R&D)기반이 국내에 함께 있어야 한다. 끊임없는 R&D로 개발한 기술과 신제품을 검증하는 테스트 베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국내 제조기반이 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엑스 인 더 루프’를 접목하면 제품 개발기간 단축, 품질 향상, 원가 절감의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엑스 인 더 루프’의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돼 조립업체와 부품업체가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했으면 한다.

유지수 < 국민대 총장·경영학 jisoo@kookmi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