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고교 연구과제도 '알바'가 대행

고교 R&E보고서 '대리 알바' 성행

"70만원 사례금…우수하면 보너스도"
교사까지 가담하는 비뚤어진 '대입스펙' 쌓기

입시 수단 전락한 R&E
'대입에 유리하다' 입소문, 특목고→일반고로 확산…교육부, 대책마련에 고심

GMAT '족보' 암거래도 성행
인터넷선 30만원에 거래, '질 좋은 족보' 강사 평가 잣대…로펌 입사에서도 문제돼
창의적 인재양성이라는 당초 도입 취지와 달리 고등학교 R&E가 대학 합격을 위한 ‘스펙쌓기’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고등학생 과학실험탐구토론대회에 참석한 한 학생이 소금물을 증발시켜 순수한 소금을 얻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고교생 연구교육 과제(R&E·research&education) 보고서를 대신 작성해 줄 화학 전공자를 찾습니다.’

최근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수소 연료전지에 관한 실험을 진행한 뒤 실험보고서와 발표자료(PPT)를 만들어 주면 70만원을 지급하겠다. 내용이 우수하면 보너스 지급도 가능하다’는 설명도 붙어 있다.
대학원생으로 가장해 게시글에 나온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이 학생은 선생님을 통해 연락하겠다고 답했고, 얼마 뒤 학생의 지도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들이 실험에 직접 참여하느냐는 질문에 이 교사는 “주제를 정해서 실험까지 다 해주면 좋겠고, 대학원에서 비슷한 사례를 연구한 자료도 함께 받고 싶다”고 말했다.학생들은 내신 준비에 바쁘기 때문에 과제 선정부터 실험과 보고서 작성까지 ‘턴키’로 대행해 달라는 얘기였다.

R&E는 고교생들이 학기 중이나 방학 때 팀을 이뤄 과학연구를 진행하는 과제다. 각종 경시대회에서 R&E로 입상하거나, 수행 결과를 대학 입학사정관 전형 때 자기소개서에 쓰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최근엔 명문대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앞다퉈 R&E에 참여하고 있다.

대입을 위한 스펙쌓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부 학생과 교사, 그리고 대학·대학원생의 도덕적해이(모럴해저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R&E를 ‘턴키’로 대행하는 아르바이트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대입뿐만이 아니다. 해외 경영대학원(MBA) 입학시험인 GMAT ‘족보’는 수십만원에 유통되기도 한다.입시 수단 전락 R&E 대행 ‘알바’ 등장

R&E는 창의적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2002년 한국과학영재학교에 도입된 고교생 연구교육 과제였다. 처음엔 입시와 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R&E 수행 실적으로 명문대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효과를 봤다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최근 수년간 특목고뿐만 아니라 일반고로도 ‘R&E 열풍’이 빠르게 확산됐다. 실제로 입시 관련 인터넷 카페에는 “R&E로 대입에 성공했다”는 학생 후기가 잇따르고 있다.

R&E에 대한 학교와 학생들의 관심이 커지자 교육부는 지원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100개팀에 평균 500만원씩 5억원을 지원했고, 올해는 지원 규모를 110개팀(6억원)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창의적 인재 양성이라는 도입 취지와 달리 R&E가 대학 합격을 위한 ‘스펙 쌓기’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대학 게시판, 아르바이트 사이트 등에 R&E를 통째로 대신해줄 대학생·대학원생을 찾는 ‘구인광고’가 등장한 것이다.

이 같은 부정행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R&E팀을 지도하는 교사까지 나서는 실정이다. 강남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R&E는 담당 교사와 학생 4~5명이 팀을 이뤄 수행하는 게 보통”이라며 “교사 중엔 실험이나 연구를 실제로 해본 사람이 드물어 외부 전공자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렇다 보니 학생과 교사들이 70만~80만원의 대가를 지급하고 대학·대학원생을 ‘R&E 대행 알바’로 사실상 고용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물론 대학·대학원생에겐 용돈벌이가 된다. 명문대에 입학하려는 학생, 입시 실적에 내몰린 교사, 돈벌이에 나선 대학생·대학원생 등 3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모럴해저드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편법 횡행하는 한국의 입시문화

입시 모럴해저드는 대학 입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MBA 입학자격시험인 GMAT에는 ‘족보’ 또는 ‘후기’로 불리는 기출문제 모음집이 유통되고 있다. 직장인 B씨(39)는 족보를 활용, 성적을 단숨에 끌어올린 케이스다. 그는 지난해 8월 처음 치른 GMAT에서 730점을 받았다. 730점은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등 미국 내 최상위권 MBA에 진학할 수 있는 점수다.

B씨의 평소 모의고사 점수는 600점 중후반대였다. 비결은 ‘족보’였다. 그는 시험 1주일 전 인터넷 강사에게 18만원을 주고 최근 출제된 수리영역 기출문제 250여개를 구매했다. 시험 3일 전에는 17만원을 내고 유명 어학원에서 3시간 동안 언어영역 족보 특강을 들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수리영역 20문제는 족보와 동일하거나 +, - 부호만 바뀐 채 출제됐다. 언어영역에선 지문 2개가 족보에 있던 내용이었다. 특히 미국 걸스카우트 역사에 대한 지문은 내용의 80~90%가 동일했다. 그는 “족보를 봐도 이 정도까지 겹치는 내용이 나오는 건 힘든데 운이 좋았다”며 “페어플레이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뒤늦게 MBA를 준비하는 처지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법학전문대학원 입시와 대형 로펌 입사에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대신 작성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자기소개서 컨설팅 비용은 약 80만원이고, 취업에 성공하면 추가로 80만원을 지급하는 조건이다. 앞서 지난해 11월엔 첨단기기를 활용해 토익·토플 시험을 치른 사건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中서 생산된 GMAT 족보도 유입

각종 입시학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엔 중국에서 생산된 족보까지 국내에 유입돼 암거래되고 있다. GMAT의 경우 매년 4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시험을 보는 중국은 ‘족보 생산 공장’으로 불린다. GMAT는 미리 준비된 수천개의 문제 중 무작위로 출제되는 문제은행 방식을 적용하고 있는데, 응시자 수가 많은 중국에서 편법 수요가 많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강남의 한 어학원 관계자는 “중국에선 10여명씩 조를 짜 시험장에 들어간 뒤 각자 맡은 문제들을 통째로 외워 재복원하는 방식으로 족보가 생산되는 것으로 안다”며 “질 좋은 족보를 확보하는 게 GMAT 강사 평가의 잣대가 될 정도”라고 전했다.

인터넷으로 10년째 GMAT 강의를 하고 있는 C씨는 “현재 30명의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다”며 “수업교재의 70%는 중국에서 만든 후기(족보)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등에서는 GMAT 족보가 30만원대에 거래된다. GMAT 족보와 함께 입시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는 인터넷 카페 가입 비용은 첫 달 32만원, 두 번째 달부터 27만원 수준이다.

기관들 초비상

각종 시험에서 모럴해저드가 확산되자 관련 기관들은 비상이 걸렸다. R&E를 공동으로 지원 중인 교육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은 고교생이 직접 작성하지 않은 보고서와 발표자료를 걸러낼 수 있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관계자는 “창의재단 R&E 과제는 융합형이라 대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철저히 관리감독하겠다”며 “R&E가 학생들의 창의력을 길러주는 당초의 취지에서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입시라는 눈앞의 이익, 그리고 결과로만 평가받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이 같은 ‘반칙’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R&E의 경우 공교육 커리큘럼 내에서 이뤄지는 수업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팀을 만들다보니 부작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과제 수행을 위한 교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성과를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종효 건국대 사범대학 교수는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어디까지가 공정한 것이고 올바른 것인지 도덕적으로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호/홍선표/박재민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