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 1병영] 우병서 사장 "해외시장 개척 비결? 유격훈련 떠올리면 못할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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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3
나의 병영 이야기 - 우병서 싸이먼 사장
1971년 학군 9기로 화천서 복무
계급장 떼고 지옥의 유격훈련
'칠순 현역' 비결도 유격 정신력

우선 유격장까지 가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저녁식사 후 해가 진 뒤 출발했다. 가기 전에 철모의 소위 계급장은 돌로 갈아서 없애버렸다. 계급장 떼고 훈련받기 위해서다. 빨간모자를 쓴 조교들에게 둘러싸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옆으로 굴러’를 수없이 하면서 무등산 넘어 유격장에 도착하면 동이 트면서 아름다운 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그런 경치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중위 진급 대상이었지만 진급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확인한 나는 소위 주제에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따지기도 했다. 그 결과 행정착오였다는 설명을 듣고 진급자 명단에 넣어줬다. 진급 후 대대참모로 부임한 뒤 보급관을 맡았다. 보급관이 겉으로는 편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군량미 피복 유류뿐 아니라 취사도 담당했다. 대대원들이 먹고 입고 훈련받을 것에 대한 모든 물품과 식량을 책임지는 자리다. 이 중 일부 취사병들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타부대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병을 취사병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있었다. 이들 ‘관심사병’을 통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제대를 앞둔 어느 날 연대장이 숙소를 찾아왔다. ‘우 중위는 군인 체질인데 장기복무를 지원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장기복무를 지원하면 바로 지원중대장 보직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도 해왔다. 연대장께서 나를 잘 보신 것이었다.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장군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만약 장기복무를 했으면 별을 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 와세다대 유학을 생각하고 있어 장기복무를 고사했다.
군생활에서의 힘든 훈련과 통솔력이 제대 후 한화그룹 근무를 거쳐 창업해 연간 500만~600만달러의 ‘작업용 비옷’을 들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로 수출전선을 누비며 바이어와 상담을 벌일 땐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다. 돌파해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저승사자와 염라대왕을 떠올린다. 나를 강하게 키워준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것도 그때의 정신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구레나룻 염라대왕의 소식을 알게 되면 저녁식사라도 한끼 대접하고 싶다.
우병서 < 싸이먼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