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책을 읽으면 어리석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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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7
고전통변 / 노관범 지음 / 김영사 / 512쪽 / 1만4000원“책 읽기는 식견을 구하려고 하는 건데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읽고만 있으니 아니 읽는 것만 못하고, 글쓰기는 식견을 드러내려 하는 건데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쓰고만 있으니 아니 쓴 것만 못하다.”
조선 문인 김창희는 1885년 완성한 《회흔영》에서 당시 숙사(塾師·글방 선생)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독다작의 훈련만 일삼는 상황을 이렇게 비판했다. “책 읽기를 더할수록 어리석음이 증가하고 글쓰기를 더할수록 진실성이 상실된다”는 비관적인 진단이었다.《고전통변》은 한국 지성사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가 한국고전번역원의 메일링 서비스 ‘고전의 향기’를 통해 선보였던 글 50편을 모은 책이다. 이중 일부는 한국경제신문 ‘인문학 산책’ 코너를 통해 서도 소개됐다. 저자는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까지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옛글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연결해 되살리고 사유한다.
1714년 스물둘의 나이에 명·청 교체기의 중국사를 음양의 이치로 논한 조구명의 통찰력 있는 역사 인식부터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을 애통해하는 20세기 제주학의 거장 김석익의 비탄에 이르기까지 200여년에 걸친 문장들을 통해 지금 시대의 화두를 되새긴다.《회흔영》편에선 아무런 식견 없이 옛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낡은 관습을 극복하고자 했던 김창희의 글쓰기 철학을 소개하며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식견을 기르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저자가 서문에 쓴 대로 선인의 옛글에서 펄럭이는 역사를 가뿐하게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재미를 느낄 만하다. 미얀마에 대한 한시가 담긴 조수삼의 《추재집》에서 김석익의 《탐라기년》까지 각 편에 수록된 50점의 도판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