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정유사들의 속앓이
입력
수정
지면A34
박해영 산업부 기자 bono@hankyung.com국내 정유업계가 정부의 ‘동북아 오일허브’ 추진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정유사의 저장시설 등록 기준 요건을 완화하는 등 규제를 푸는 조치를 내놨는데도 업계 반응은 왠지 시큰둥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석유 저장시설로 등록하려면 내수판매 계획량 기준으로 60일분 저장시설을 갖추게 돼 있는 규정을 40일분으로 낮추고, 보세구역 내에서의 제품 혼합(블랜딩)과 품질 보정 행위도 허용하기로 했다. 유럽 ARA, 싱가포르 등 다른 오일허브 지역과 비슷한 수준의 활동을 보장한 것이다. 울산과 여수 지역을 중심으로 저장시스템과 유통망을 구축해 에너지 안정화를 꾀하겠다는 정책의 일환이다.문제는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당장 4억배럴 규모의 물동량 탱크 터미널을 확보하려면 2조원가량의 민간 자본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정유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정제 마진이 줄면서 영업이익률이 1% 정도로 떨어진 정유사들은 정부의 압박으로 마지못해 자본을 대야 하는 상황을 맞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수익성 악화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할 정도로 어려운 기업 형편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오일허브 정책을 추진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A정유사 한 임원은 “동북아 오일허브 구상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라며 “최근 정부가 내놓고 있는 대책은 정유사들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피상적인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을 싱가포르와 같은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오일허브로 키우는 것은 장기간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사업인 만큼 단기에 성과를 내겠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정유업계의 진단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장 원리에 의해 기업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고 규제의 칼을 쥐고 있는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이면 부작용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동북아 오일허브’ 정책 효과에 대한 정부와 업계 간 인식 차이가 큰 만큼 사업 타당성을 면밀히 따져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박해영 산업부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