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권력은 사라져도 예술은 영원…르네상스 부자들의 돈 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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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48) 메디치가와 예술 후원1401년 피렌체에서는 세기의 콩쿠르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동업자조합(길드)이 두오모 대성당 부속 조바니세례당 입구에 설치한 청동문 제작자를 공개경쟁을 통해 뽑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피렌체를 주름잡던 공방의 쟁쟁한 예술가 7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동업자조합은 이들 중 2명을 최종 후보자로 낙점하기로 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23세의 기베르티와 24세의 브루넬레스키 등 약관의 두 젊은 예술가의 작품이 최종후보자로 결정됐다. 다시 두 사람의 대결을 거쳐 결국 기베르티가 우승자로 결정됐다.
나중에 기베르티가 조합 측에 요구한 제작비는 모두 2만2000플로린이었다. 자신의 보수와 함께 재료비, 조수의 품삯을 합친 비용이었다. 이로부터 1세기 뒤에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명을 받아 시스틴 성당에 그린 천장화 ‘천지 창조’의 제작비가 3000플로린이니까 단순 비교만 해도 무려 7배가 넘는 비용이 투입된 셈이다. 교황청을 무색하게 하는 피렌체의 재력도 재력이거니와 동업자조합의 통 큰 예술 지원에 입이 벌어진다. 물론 르네상스기 예술 후원은 종교적 열정도 무시 못 할 요인이었다.이 사건은 예술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사건이다.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탈리아에는 예술가의 창조적 재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단순한 육체노동이나 기술이 아닌 정신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이런 예술가들의 역량을 인정하고 활동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후원자(Patron)들의 역할이 있었다. 피렌체의 동업자조합처럼 집단적인 후원도 있었지만 대개 정치적·경제적 유력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메디치가는 그중 대표적인 예다.
메디치가는 원래 몇 개의 지점을 거느린 중소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반니 디 비치 드 메디치(1360년께~1429)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준 게 계기가 돼 교황청의 은행 거래를 독점하게 되고 덕분에 이탈리아 최대 은행으로 성장한다. 이 가문은 이후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까지 거머쥐어 사실상 피렌체의 군주로 군림한다. 그러나 메디치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의 남다른 예술 후원활동에 따른 것이다.
예술 후원이라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엉뚱한’ 활동에 처음으로 돈을 쏟아부은 사람은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였다. 그는 예술과 정치 활동 지원비로 평생 금화 15만플로린(미화 약 3000만달러)이라는 거금을 지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만년에 “난 50년 동안 돈을 벌고 쓰는 일 외에는 한 게 없다. 분명한 건 버는 것보다 쓰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건축가 미켈로치, 화가 마사초와 프라 안젤리코, 조각가 도나텔로가 그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브루넬레스키를 시켜 두오모 성당의 거대한 돔을 건설하게 한 것도 코시모였다. 그는 부자의 사회적 책무를 자각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다.코시모의 손자로 메디치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로렌초, 1449~1492)도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할아버지만큼 씀씀이가 헤프지는 않았지만 그는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예술가, 정치이론가인 마키아벨리,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그는 생전에 “우리의 권력은 50년을 넘기 어렵겠지만 우리가 세운 건축물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권력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던 그의 말대로 메디치가의 권력은 18세기에 막을 내렸지만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건축과 예술품 속에 오늘도 살아있다.
메디치가가 배출한 두 명의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와 클레멘트 7세(재위 1523~1534)도 못 말리는 예술 애호가였다. 레오 10세는 로마제국의 영화를 되찾아야 한다며 문학과 연극에 교황청 재정을 쏟아부었고 클레멘트 7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틴 성당 제단 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했다. 코시모 1세 대공은 여기저기 분산돼 있던 메디치가의 사무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우피치(사무실이라는 뜻)’를 건설했는데 이 건물의 꼭대기 층에 그간 메디치가의 지배자들이 150여년간 수집한 예술품을 진열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미술 최고의 순례지인 우피치 미술관의 초석을 다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메디치가의 권력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예견한 50년보다는 훨씬 오래 지속됐지만 쇠락을 피할 수는 없었다.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상속자인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는 우피치 소장품을 포함한 메디치가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
메디치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예술 및 학문 후원활동은 이탈리아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부의 사회 환원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값진 유산을 서구 근대사회에 남겼다.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