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피케티 '21세기 자본론'의 치명적 오류

자본수익은 기업가적 노력의 산물
정실주의에 따른 불평등 주목하고
규제 쌓는 '민주주의 과잉' 경계를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 교수 kwumin@hanmail.net >
불평등의 씨앗이요 저성장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반(反)자본 선전포고를 하면서 등장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지성계를 강타하고 있다. 자본수익은 경제성장보다 빨리 증대하기에 부유한 자본가는 더 부유해지고 자본은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이다. 부의 세습은 민주주의까지도 파괴한다고 경고하면서 그런 사악한 자본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고율의 자본세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본에 대한 불신에서, 분배정의를 신성한 해결책이라고 믿는 진영에서는 피케티의 사회주의적 주장을 열렬히 환호한다. 다른 편에서는 이론과 철학 없이 통계분석에만 의존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옳지 않다. 이론이 없으면 세상을 볼 수도, 통계를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피케티의 통계분석을 추적하면 그 바탕에는 자본은 ‘쉬지 않고 스스로 증식한다’는 자본에 관한 관점이 깔려 있다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자본관은 과일나무에 열매가 맺히듯 인간행동이 없이도 항상 자동적으로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자본수익이 경제성장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그래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유도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의 힘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자본인식은 틀렸다. 자본은 스스로 수익을 내는 게 아니다. 그 수익은 자본을 생산적으로 이용하려는 기업가적 착상과 능력, 노력의 산물이다. 자본축적도 자동적인 게 아니다. 이는 현재를 미래보다 더 중시한다는 뜻의 ‘시간선호’를 반영한 인간행동의 결과다. 저축하여 자본재 지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게 복잡하고 다양한 자본구조이고, 이 구조가 생산성, 고용 등을 통해서 노동, 자본 모두를 부유하게 만드는 보편적 번영의 진원지라는 걸 주지해야 한다.

피케티의 자본관은 그런 생산구조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은 노동의 친구가 아니라 노동의 몫을 등쳐 먹는 적이라고 왜곡한다. 그가 사용하는 소득 개념도 그런 자본을 이용하는 경제를 이해할 수 없다. 피케티가 평등분배를 위한 징벌적 자본세 도입을 주장하는 것도 자본은 스스로 증식하기에 그런 과세가 생산성,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세의 영향은 파괴적이어서 서민층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악질적 세제라는 걸 알아야 한다.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즉 거품(호황)이 최고에 도달했던 시기에 상위 10%의 분배 몫이 50%로 역사상 가장 컸던 이유를 자본축적과 이에 따른 과소소비에서 찾는 것도 피케티의 잘못된 자본인식 탓이다. 하이에크가 보여주듯이 그런 거품은 중앙은행이 너무 많은 돈을 새로 찍어낸 결과라는 걸 알아야 한다. 새 돈의 공급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계층이 있는데 인플레이션 영향을 받기 전에 새 돈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정부 중앙은행과 커넥션을 가진 상위 10%에 속하는 금융·산업계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주목할 것은 불평등의 주범은 자본축적이 아니라 경제적 성공이 정부의 정실(情實)에 의해 결정되는 정실주의(cronyism)라는 점이다. 이는 자유시장과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부자의 자본축적으로 위태로워진다는 피케티의 주장도 틀렸다. 우려할 것은 다수결 원칙의 민주정치다. 이게 과잉되면 규제, 과세, 보조금 등 시장의 진화적 힘을 방해하는 제도가 겹겹이 쌓인다. 그런 제도에서 번창하는 건 관료 정치, 그리고 그 연고자들로 구성된 먹이사슬의 정실주의다. 이는 번영을 갉아먹으면서 불평등만을 심화시키는 현대사회의 암적 존재다.

한국 경제의 불평등 심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그건 결코 자본과 자본세습 탓이 아니라 관피아, 모피아, 법피아 같은 정실주의와 이를 야기하는 천민적 민주정치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 교수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