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 1병영] 이명철 국군수도병원장 "軍서 깨달은 '함께'의 힘…도전정신의 밑거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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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7
나의 병영 이야기
'빡빡머리'의 연대장 후보생
얼차려 사고에 사과 받아내
동료 함께할 때 '리더 힘' 생겨
![1978년 대구 국군군의학교 장교 후보생 시절의 이명철 병원장(왼쪽).](https://img.hankyung.com/photo/201406/AA.8774813.1.jpg)
1978년 4월, 서울대 내과 전공의를 수료한 뒤 입대했다. 사실 입대 초기에는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대구 국군군의학교에 입대하기 전 으레 다른 군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갔더니, 장교 후보생은 단정한 스포츠머리가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입대와 동시에 중대장에게 ‘명령 불복종’ 소리를 듣고, 부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돼버렸다.다행히 나중에는 그 일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돼서 빡빡머리에 덩치 큰 연대장 후보생으로 낙찰됐다. 그러나 당시는 몸집이 다소 뚱뚱했던 터라 연대장 후보생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결국 책임감을 갖고 평소에도 구보 연습이나 운동을 꾸준히 했고, 나중에는 구령을 부르며 770명의 동기들을 앞에서 이끌고 뛰어다녀도 끄떡없을 만큼 체력을 단련했다. 그때는 그저 그 자리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https://img.hankyung.com/photo/201406/AA.8774152.1.jpg)
훈련을 마치고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1부 1과 2실장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내과 부장, 유행성출혈열과 과장, 동위원소실 실장, 인공신장실 실장을 맡았는데, 특히 유행성출혈열과 과장일 때 치료팀은 최상의 드림팀이었다. 밤중에 복막투석, 수술 집도 등 민간 병원이나 다른 곳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헬기로 이송돼 오곤 했다.
그 후 34년이 지나 올해 2월, 나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금 국군수도병원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민간 의사 출신 병원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부담감도 컸다.이제 다시금 내가 도전해야 할 일이 생겼다. 대학병원 교수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험난한 길을 택한 나는 또 한번 ‘함께’의 힘을 발휘하려 한다. 인간의 인생 동력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꿈의 크기, 변화의 크기, 네트워킹의 크기다. 이 세 가지는 인생동력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모든 것은 나 혼자 하기엔 시간도, 돈도, 힘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함께하는 것, 더불어 하는 것이다. 국군수도병원은 지금으로선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함께’의 원칙으로 대한민국 국군장병과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키워낼 작정이다.
이명철 < 국군수도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