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매 맞는 남편, 중세엔 '동네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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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바리1668년 프랑스 리옹에서 수레 제조장을 운영하던 과부 플로리는 자신이 고용한 젊은 마차꾼 티세랑과 재혼한다. 결혼식 날 마을 청년 30~40명이 신혼집으로 몰려가 악기와 주방기구, 작업도구 등을 두드리며 소란을 떤다.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노래를 부르며 연방 ‘샤리바리! 샤리바리!’라고 외친다.
윤선자 지음 / 열린책들 / 472쪽 / 2만5000원
《샤리바리》는 중세 이후 유럽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샤리바리’의 문화인류학적 의미와 역사적 변천 과정을 깊이있게 분석한다. 저자는 ‘샤리바리’를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소란과 조롱, 폭력 등으로 처벌하는 유럽의 민중적 관행”이라고 정의한다.샤리바리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제재 대상은 성 일탈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토태가 성 규범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간통뿐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을 의미하는 출산을 저해할 수 있는 재혼과 불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는 ‘매 맞는 남편’도 샤리바리의 대상이었다. ‘플로리 부인’ 사례는 가장 약한 수준의 샤리바리다. 기물 파괴나 구타 등 신체적·물리적 폭력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샤리바리는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정치·경제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 변모한다. 중앙 집권화와 공권력 강화, 개인주의, 사유 재산, 합리주의 등 근대적 시스템이 샤리바리의 정신인 공동체주의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