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임종룡 농협금융지주 회장 "학연·지연·혈연은 '뜬구름'…가장 든든한 빽은 상사"
입력
수정
지면A29
인생 제1 덕목은 '진정성'“학연, 지연, 혈연 같은 빽은 허망한 것이에요. 어느 시대에나 각광받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죠.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은 빽 때문입니다. 변치 않는 빽은 바로 상사입니다. 상사의 인정은 직장에서 소멸하지 않는 빽입니다.”
어떤 자세 갖느냐에 결과 좌우
진정성 있으면 모두 헤쳐나가
시장서 통하는 농협금융이 꿈
우투證 인수 전사적 지원 이끌어
관료화된 조직문화 바꿀 것
세월호 사고의 후폭풍이 ‘관피아’ 문제로 이어지며 나라를 흔들고 있다. ‘관피아’의 어원은 ‘모피아’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의 영문 약칭 MOF에 범죄조직 마피아를 합친 조어다. 전·현직 경제관료들이 거미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익집단처럼 행동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용어다.
임종룡 농협금융지주 회장(55)은 바로 그 모피아다. 경제부처의 요직을 모두 거친 실력파 관료다.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 제1차관을 거쳐 국무총리실장까지 역임했다. 지난해 그가 농협금융 회장에 선임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장을 모르는 관료 출신이, 그것도 특수성이 남다른 농협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냉소였다. 농협 직원들은 막 부임한 임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품평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임 회장은 여전히 내부에서 ‘감시’받고 있다. 그런데 이유가 전과 다르다. 혹여나 임 회장이 농협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최상위 조직인 콧대 높은 농협중앙회에서 농협금융 임원들에게 은근히 내린 일종의 특명이다. 임 회장이 농협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됐다는 얘기다. 30여년 공직을 뒤로 하고 민간에서 탁월한 실적으로 모피아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있는 임 회장을 서울 충정로의 양곱창 전문식당 평동집에서 만났다.◆‘매사에 감사하라’던 어머니의 가르침
평동집은 양곱창 전문이지만 불고기도 맛있게 한다. 임 회장은 불고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 우리투자증권 패키지 인수단 출범도 이 식당에서 했다. “어렸을 때 1주일에 한 번, 일요일 아침에는 언제나 가족들이 둘러앉아 불고기를 먹었습니다. 지금도 불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예요.”
평동집 불고기는 농협이 운영하는 대형할인점 하나로마트에서 가져온다. 주인 아주머니가 불고기를 내오면서 “일하는 아줌마 빼고는 전부 국산”이라고 농을 던졌다. 중국동포 출신 종업원 외에는 모든 식재료가 국산이라는 말이다.임 회장의 고향은 전남 보성이다. 장남인 임 회장을 포함해 5남매가 그 시절 매주 불고기를 먹었으니 나름 유복한 집이었다. 임 회장이 네 살 때 아버지가 서울의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추첨으로 영동고에 입학했다. “공부를 꽤 잘했습니다. 전교 4등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비고사를 못 봤어요. 상대를 가고 싶어 서울대는 포기했습니다.” 그는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동생 4명을 생각하면 재수할 수는 없었어요.”회계사를 생각하다 아버지의 권유로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3학년 때 합격했다. 12·12 사태 등으로 학교 생활이 쉽지 않았던 때다. 그래서 4학년 때 고향인 보성 군청에서의 수습을 자처해 낙향했다. 당시 보성에는 그를 유난히 아낀 할머니가 혼자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보성군수, 그 다음이 보성농협 지부장인 줄 아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지부장을 해 보라고 하셨죠. 제가 농협금융 회장이 돼서 소원을 들어드린 것 같아 뿌듯하더군요.”
임 회장을 만나 본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기까지…’라는 평을 내놓는다. 그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변을 배려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한 결과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임 회장이 늘 마음에 담아두는 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성경 시편 23편 1절이다.
◆‘상사의 인정’이 가장 훌륭한 ‘빽’
사실 겸손함은 개성과 주장이 강한 경제관료들에게서 찾기 쉽지 않은 캐릭터다. 그는 “서울대가 아닌 마이너리티(소수파)로 지낸 것도 겸손함을 갖추게 된 계기였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2개월 수습을 끝내고 보성군청에서 재무부로 발령받은 그에게 상사들은 늘 ‘무슨 과를 나왔느냐’고 물어왔다. 다른 사무관들처럼 당연히 서울대 출신일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었다. 반복적인 질문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낮은 자세로 일에 집중하는 계기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재무부는 철저하게 성과 중심의 문화가 자리잡은 곳이었어요. 잘하면 대우받을 수 있었지요. 탁월한 상사들도 많아 잘 배우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빽도 줄도 없었지만 그는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겸손한 자세로 언제나 힘들고 궂은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쌓이고 언제부터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임종룡 빨리 불러와’라는 말이 상급자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부친 임종 못 지켰지만 나랏일은 원래 그런 것”
그는 재무부에서도 핵심 부서인 금융정책국에서 은행제도과장, 증권제도과장, 금융정책과장을 연이어 거쳤다. 1980년대 해운업 구조조정부터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어려운 구조조정 업무도 맡았다. 구조조정 업무를 하며 만난 상사들이 지금의 임 회장을 만들었다. 그는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현 나이스그룹 금융부문 회장), 변양호 전 금융정보분석원장(보고펀드 대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윤진식 전 국회의원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2002년 금융정책과장으로 ‘잘 나가던’ 시절 전윤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이 경제정책 업무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때까지 금융 부문에서 성과를 쌓아온 만큼 경제 쪽으로의 선회는 선뜻 내키지 않은 선택이었다. 승진까지 앞둔 상황에서 다른 분야를 맡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변양호 당시 금융정책국장은 “한 쪽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이 좋다”며 도전을 권유했다. 결국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때의 경험은 이후 관료생활에 날개를 달아줬다. “경제와 금융, 두 부문의 주무과장을 거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기재부 차관까지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임 회장은 선한 눈매와 달리 업무 집중력이 남다르다. 2009년 11월 청와대 근무 시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하던 일을 마무리짓느라 임종을 놓치기도 했다. 국가적인 행사였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를 위해 진행 중인 중요한 회의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랏일은 사명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늘 제게 집안일보다 나랏일이 먼저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지켰다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시장에서 통하는 농협금융 만드는 게 목표
임 회장이 콩국수를 시켰다. 치악산에서 키운 콩으로 만든 국수라고 한다. 깊은 면발의 맛이 느껴졌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진정성’이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는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를 갖느냐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진정성 있는 자세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지요.”
그의 진정성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농협에서도 통했다. 취임 후 불과 3개월 만에 ‘우리투자증권 패키지’ 인수전 참여를 선언해 작년 말 인수자로 뽑히고, 이달 초 금융위원회로부터 승인까지 받은 데서 잘 드러난다. 농협금융 사상 가장 큰 인수합병(M&A)을 불과 10개월도 안돼 마무리한 것이다. 깐깐하고 개성 강하기로 유명한 농협중앙회의 이사 30명이 지난해 8월 임 회장이 직접 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진정성을 읽어내고, 기립박수로 전폭 지원한 결과다.
“그동안 농협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게 크게 힘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상당히 관료화했고요. 시장에서 경쟁하는 농협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 노하우를 터득하지 못하면 농협의 특성상 외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라운드 휘저은 재무부 ‘축구스타’
임종룡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인생에서 축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옛 재무부 축구대회에서 그가 속한 부서 선수들의 제1목표가 ‘임종룡에게 패스 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축구를 잘했다. 수습사무관 시절 증권보험국의 사상 첫 승리, 사무관 시절 국고국의 사상 첫 준우승은 모두 그의 발끝에서 이뤄졌다. 그는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나서야 축구를 그만뒀다”고 했다.임종룡 농협금융 회장의 단골집 ‘평동집’ 기름기 쫙 뺀 양곱창·옛날식 등심불고기 ‘군침’
국내산 식재료만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양곱창 전문점이다. 거의 대부분 재료를 농협에서 사다 쓴다. 농협 직원은 물론 인근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다.
저녁에는 양곱창구이와 등심불고기가 많이 팔린다. 양곱창구이는 1인분에 2만6000원이다. 마장동 곱창만 갖다 쓴다. 다른 식당보다 곱창을 많이 씻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기름기가 적다. 곱창전골(1만4000원)도 있다. 등심불고기(1만3000원)는 농협에서 사온 국내산 육우로 만든다. 옛날식 그대로다. 콩국수(8000원)는 치악산에서 키운 콩으로 만든다. 식당에서 주문과 동시에 바로 직접 갈아서 만들어 낸다. 콩 맛이 그대로 전해져 인기가 많다.
점심 메뉴 중에는 양곰탕(9000원)이 많이 팔린다. 양의 얇은 부위만 넣어서 끓인다. 김치찌개(8000원)와 된장찌개(7000원)도 있다. 뻑뻑하게 끓여내서 손님이 많이 찾는 메뉴 중 하나다. 사장이 직접 요리를 한다. 음식이 특별하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다.평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토요일에는 오후 9시까지만 영업하고 일요일에는 쉰다. 종로구 평동에서만 23년간 영업하다 지난해 10월 서대문구 냉천동으로 이사했다. 그러다 보니 포털사이트에서 식당 위치를 검색하면 아직도 예전 주소로 나온다. 현재 주소는 냉천동 184의 11이다. 전화번호는 (02)733-3590으로 예전과 같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