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료 떼먹고 제작비 '배째라'…불공정 관행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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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이제 정말 지칩니다. 연극 무대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드네요.”
영화제작사에 그림 100편 그려주고 10점 억지 기증
공연 출연료 50만원 구두약속 수개월 지나도 못받아
김인선 문화스포츠부 기자 inddo@hankyung.com
8년차 연극배우 안상호 씨(33·가명)는 최근 사석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한 해 5편 이상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였지만 “배신감이 든다”고 했다.올 초 그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극단과 함께 작업했다. 출연료로 50만원을 받기로 구두로 약속받았다. 공연이 끝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까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출연료를 떼인 게 한두 번이랴’하며 잊으려 하다가도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렵다고 했다.
“그동안 무대를 위해 공들인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해요. 아무리 제가 이 일을 좋아서 한다지만 최소한의 돈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국 내 문화예술 산업은 해마다 성장을 거듭해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공연단체 매출은 2010년 대비 51.4%(1140억원) 증가했다. 영화 매출은 지난해 사상 최고액인 1조8839억원을 기록했고 2011년 음악산업 매출은 3조8174억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화산업의 파이를 키우는 핵심 일꾼인 예술인의 삶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다. 아직도 임금 체납이 만연하고,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받는 게 현실이다.공연 제작자 최모씨는 지난해 한 단체와 1500만원에 계약해 아동극을 만들었다. 공연까지 무사히 끝냈지만 그는 아직까지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했다. 계약서를 작성했건만 무용지물이었다. 돈을 주기로 한 업체 대표는 ‘배 째라’ 식으로 나오고 있다.
악덕 공연 제작사 중에는 고의로 파업 신고를 하고 임금 지급 의무를 면제받는 경우도 있다. 파업 신고를 하면 채권을 청구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을 떼어먹은 극단 대표를 잡으러 지방까지 내려가 돈을 받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공연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술가 임모씨는 지난해 영화에 나오는 그림 100여점을 그리기로 영화제작사와 구두로 계약했다. 그러나 정작 제작사가 가져온 표준계약서에는 임씨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 제작사 측에서 10여점이나 무료로 작품을 갖겠다고 했고, 당초 약속한 작업 기간보다 몇 달이나 더 일해야 했다. 그는 억울했지만 결국 업체가 제시한 대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 계약서조차 쓰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웹툰 작가 문모씨는 한 온라인 게임업체와 계약을 맺고 편당 15만원씩 10회분을 연재했지만 원고료를 받지 못했다.문화부는 문화예술계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부터 분야별로 표준계약서를 마련해왔다. 현재 공연예술·대중문화·출판·영화 분야의 표준계약서가 제정됐다.
문 화부는 또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함께 지난 4월 ‘문화예술 용역 관련 금지행위 심사 지침’을 제정했다. 지침은 불공정한 계약 강요 행위, 수익배분 거부·지연·제한 행위, 예술창작활동 방해·지시·간섭 행위, 정보의 부당이용·제공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다. 문화부는 사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시정명령과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인 1인당 최대 200만원의 소송 비용도 지원한다.
하지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따르면 현재까지 불공정 관행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결과적으로 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상담하는 경우는 많지만 직접 법적 소송까지 하는 경우는 없다. 해당 분야를 떠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볼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응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화부가 표준계약서를 제정해 홍보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선 무용지물인 셈이다.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는 현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공연 제작사와 배우 및 스태프는 갑을 관계다. 을이 갑에게 어떻게 요구를 하겠는가.”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