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송상현 ICC 소장 "외국기업 유치 위해선 법적 인센티브보다 사법 신뢰가 더 중요"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한국 찾은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

목표만 강조하다 인권 무시…사회적 광기로 나타나
승자없이 패자만 만드는 교육시스템 등 개선 시급
바깥 세상에 깜깜한 한국, 불평 말고 세계로 눈돌려야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이 인권과 법의 지배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외국 근무하다 일시 귀국해서 하루 이틀 자고 나면 답답해서 못 살겠다니까요.”

지난 3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뒤편 플래티넘 빌딩 사무실에서 만난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안타까움부터 쏟아냈다. ICC는 대량학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 등을 처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2002년 7월 설립된 최초의 상설 국제법정이다. ICC 소장은 ‘세계의 대법원장’ 격에 해당하는 자리다. 어느 국가를 방문하건 경호원이 수십명씩 달라붙고 정상급 대우를 받는다.그의 나이는 고희를 넘긴 73세. 웬만한 일은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도 한데 아쉬움을 길게 늘어놓았다. “국제사회는 인권, 법의 지배 등 보편적 가치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느라 분주한데 한국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깜깜한 데다 행복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불평으로 입이 튀어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일종의 광기”라고 표현했다. “좁은 법조계에만 집착하지 말고 세계로 눈을 돌리라”고 강의하던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열정도 여전했다.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것으로 알고 있다.

“8일 ‘법치주의와 인권을 위한 국제사법 협력’을 주제로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기조연설을 한다. 사법부는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우리 대법원이 국제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중요한 주제를 선정하고 국제적 인물들을 초청해 국제회의를 기획해서 기쁘다. 현재 국제사회의 최대 화두는 인권과 법의 지배다.”▷인권이나 법의 지배라는 주제가 이 시점에서 왜 중요한가.

“한국 사람들은 인권 하면 저항권적 인권을 떠올린다. 독재시대에 저항하던 민주투사가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만 인권은 자유권적 인권과 사회권적 인권, 노동권, 어린 아이의 놀 권리나 가족의 행복권까지도 포괄하는 기초적인 개념이다. 유럽에선 정부 공무원과 NGO(비정부기구) 사람들이 커피 농장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급한 커피(공정무역 커피)가 아니면 안 마실 정도로 근로자 인권이 생활 현장에 배어 있다. 지난 3월 헤이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렸는데 네덜란드 외교부 국장이 1만7000명 참석자들을 위해 인권 착취를 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산한 가방 선물을 고르느라 무척 고민하는 걸 봤다.”

▷인권 문제는 특정 국가에 한정된 관심사 아닌가.“지난 5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나를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이들 국가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냉전으로 고생하면서 인권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나라들이다. 그런데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절대권력자들을 잡아서 단죄하는 ICC가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해 나를 초청했다고 한다.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인권이라고 소개해 놀랐다. 서구의 대부분 나라도 인권이 우선 순위에 있지만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경제 분야에는 법의 지배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나.

“3년 전 세계은행에 가서 기조연설을 했다. 세계은행은 11월 한 주를 ‘법, 정의, 개발 주간’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전문가들을 초청한다. 세계은행이 경제 원조 여부를 결정할 때 경제학 박사 위주로 현지에 보내 그들이 작성한 경제적 타당성 보고서에 의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원조자금을 부패한 정부가 떼먹고 범죄조직이 협박해서 떼먹고 하는 등 말썽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법률팀이 먼저 들어가 부패세력을 비롯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청소해야 원조자금이 효율적으로 쓰인다’는 내용으로 기조연설했다.”▷한국도 세계은행 원조를 많이 받았다.

“1980년대 건설된 진도대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진도대교는 정주영 회장이 살아계실 때 현대건설이 지었다. 하루는 세계은행에서 감독관이 나왔는데 인부들이 철근을 땅바닥에 야적해 놓은 것을 보고는 기겁했다. ‘녹슬면 어쩌려고 그러냐. 철근을 비닐로 싸라’면서 말이다. 현대건설 측은 군말 않고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이는 (법의 지배가 적용된) 성공적인 원조 사례로 평가받는 내용이다.”

▷외국 투자 유치에도 준법질서 수준이 중요할 것 같다.

“과거 외자도입법이니 투자촉진법이니 해서 세금도 감면해주고 회계상 처리도 관대하게 해준다며 난리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그런 입법상 인센티브를 주면 다른 나라들이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법을 밤새 만들어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인 투자유치 요인은 일반인의 건전한 법의식과 사법부의 건전성이다. 돈을 벌려고 남의 나라 오는데 사기꾼들이 판치고 정부와 사법부가 법과 무관하게 자기네 기업 편만 들면 누가 투자하러 오겠나.”

▷현 정부가 법조인을 많이 발탁하고 있다.

“법조인의 요직 중용과 법의 지배는 다른 얘기다. 재작년 9월 유엔총회가 법의 지배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기업 경영, 학교 교육 등 인간 생활에 필요한 43가지 아이템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유엔에 요청해 반기문 총장이 액션플랜을 만들었다. 유엔 회원국들은 각국 사정에 맞게 이 액션플랜 시행에 필요한 실천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우리끼리 떠들면서 광기만 부리고 있다. 흥선대원군 때는 쇄국을 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지구촌이 축소돼 70억 인구가 함께 비비고 살아야 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할까봐 걱정스럽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

“ICC가 전쟁범죄, 반(反)인도적 범죄 등을 저지른 독재자들을 잡아 처벌하고 있는데, 특히 여성과 아이들 구제에 신경을 쓰니까 유니세프(국제연합아동기금) 업무와 맞아떨어진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설립된 지 올해로 만 20년 됐다. 국내 모금액도 1억달러에 달하는 등 세계 3위다. 국가별 위원회 중에는 가장 성공한 사례다. ICC도 형사법원에 머물지 않고 피해자신탁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ICC가 처벌한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자활을 돕는 구제활동이 많다. 예컨대 소년병 자활 프로그램, 미소금융, 의수족 달아주기, 모유수유 권장사업 등 다양하다.”

▷세월호 참사가 안전의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목표 달성만 강조하고 절차 윤리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특히 한국 교육 시스템이 승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패자로 만들었다. 사회심리가 건강하지 않으니까 사회적 광기로 나타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몇 주 전 유니세프 활동을 같이하는 미국 배우 앤젤리나 졸리를 런던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비관적인 생각만 하면서 자랐다고 하더라. 결혼도 실패해 본인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26세 때 파키스탄 난민수용소를 방문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ICC에서 현재 재판 중인 중요 사건은.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현 대통령과 윌리엄 루토 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다. 집단학살과 반인륜적 범죄 혐의다. 2007년 말 대통령 선거 운동 과정에서 1100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데 관여했는지 여부가 쟁점이다. ICC 검사가 기소한 내용을 보면 대통령을 배출한 부족과 부통령이 속한 부족이 원수지간이다. 부통령은 차질없이 재판에 출석하고 있고, 대통령은 10월에 재판한다.”

▷일본이 집단자위권 관련 헌법 해석을 변경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일본도 ICC 회원국이어서 입장 표명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세계적인 조류에 꼭 들어맞는 방향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이 그렇게 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간다. 시스템으로 정책이 결정되지 않고 최고지도자 개인이 가진 생각이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세계 조류에 같이 동참해서 가는 정책 결정은 아닌 듯싶다.”

■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장은

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 손자
ICC 초대 재판관…소장 연임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의 손자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14회)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 고등고시 사법과(16회)에도 합격했다. 1970년 미국 코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2년 뒤부터 30여년간 모교인 서울대 법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미국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호주 멜버른대 등에서 교환교수로 한국법을 가르쳤고,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를 맡기도 했다. 2003년 ICC의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됐고 2006년 재선됐다. 2009년 ICC 소장에 선출, 2012년 3월 연임됐다.△1941년 서울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대 △고등고시 행정과(14회)·사법과(16회) 합격 △서울대 법대 교수 △미국 뉴욕대·하버드대 법대 교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