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상품권 남발 '부메랑'…제화 빅3의 위기

산업리포트

연구개발 소홀…해외명품·후발업체에 밀려
법정관리 신청 에스콰이아·실적 반토막 엘칸토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받고 매장 밖에서 기다리도록 했어요. 먼저 온 손님이 나가면 그 다음 손님을 입장시켰습니다. 그만큼 잘 팔렸죠.”

루이비통 같은 명품 매장 얘기가 아니다. 1980~1990년대 국내 구두 시장을 장악했던 ‘토종 빅3’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매장에서 벌어졌던 일이다.제화업체 임원의 이 얘기는 이젠 한낱 과거의 ‘무용담’이 됐다. 1950~1960년대 설립돼 대량생산을 통한 기성화 시대를 연 이들 3사의 위상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금강제화 매출은 2003년 4493억원에서 지난해 3485억원, 에스콰이아(법인명 EFC)는 2427억원에서 1562억원으로 10년 새 800억~1000억원가량 줄었다. 엘칸토는 748억원에서 310억원으로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에스콰이아는 2009년 사모펀드에 넘어갔다가 판매 부진에 따른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엘칸토는 모나리자(2005년)와 이랜드(2011년) 등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실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 빈자리는 탠디, 소다 등 다품종 소량생산의 일명 ‘살롱화’와 해외 명품 구두들이 채우고 있다.

패션업계 전문가들은 토종 3사의 패착으로 ‘상품권 장사’부터 꼽는다. 구두상품권 덕에 컸지만, 나중에 발목을 잡은 것도 상품권이었다는 것이다. 구두상품권은 1980년대 명절 선물로 많이 팔리며 매출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효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94년 백화점상품권이 등장하며 인기가 떨어지자 업체들은 구두상품권을 10~20% 할인 판매하기 시작했다. 제품 가치가 떨어졌고, 할인율을 더 높여야 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랜드 관계자는 “엘칸토를 인수하고 보니 상품권 발행 규모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하게 발행되고 있었다”며 “신규 발행을 전면 중단하고 기존 발행분만 회수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금강제화와 EFC는 상품권 발행을 많이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매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상품권이 이끈 급성장에 취해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본격 진출한 수입 구두는 개성과 유행에 앞선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반면 업력이 반세기가 넘은 국산 기성화는 소비자들에게 노후화된 이미지로 비쳐졌다.

그렇다고 3사의 부진을 ‘토종 대 수입’ 구도로 볼 수만은 없다. 후발 국산 브랜드인 탠디, 소다 등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을 택한 이들은 수년 전부터 백화점 매출에서 기존 3사를 앞서고 있다. 한때 ‘제화의 거리’로 불렸던 서울 명동엔 금강제화 매장 하나만 남아 있다. 에스콰이아와 엘칸토는 상당수 백화점에서 자리를 빼야 했다. 엘칸토 관계자는 “신발은 일반 의류에 비해 색상과 사이즈가 다양해 재고 부담이 훨씬 큰 품목이라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토종 3사의 부진은 한국 신발산업의 생태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당장 법정관리를 결정한 EFC의 중소 협력업체 160여곳이 연쇄 부도 위기를 맞고 있다.이용희 한국제화산업협회 사무국장은 “제화업종에선 협력업체마다 한 거래처에만 납품하는 게 관행”이라며 “제화업체들이 수입을 늘리고 홈쇼핑 입점을 위해 납품단가를 떨어뜨리면서 하청업체들은 매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