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슈퍼맨 역할 강요, 해도 너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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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늘어나는 정부 압박A그룹의 경영기획담당 고위 임원은 최근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새롭게 내놓을 투자계획이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이 임원이 “경영여건이 어려워 추가 투자를 할 상황이 아니다”고 답하자 산업부 관계자는 “왜 (투자할 게) 없느냐, 경기활성화를 위해 투자를 좀 더 늘려줘야 한다”고 했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사실상 ‘압박’에 가까웠다는 게 이 임원의 전언이다.
"경기부양 위해 투자 늘려라…시간제 일자리 확대하라
동반성장委 예산 부담하라…소비진작用 세금 더 내라"
정부가 기업에 과도한 역할 분담을 요구한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고용, 동반성장에 이어 최근엔 경기부양과 소비진작까지 기업들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4대 그룹을 포함한 상당수 대기업들이 정부로부터 투자 확대를 요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기 경제팀이 정책 목표로 정한 경기 부양을 위해 기업들이 투자하는 데 돈을 더 풀어달라는 것. 재계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는 정부가 상·하반기에 30대 그룹 사장단을 불러 투자계획을 점검했는데, 기업들의 거부감이 심해 올해부터 투자계획을 제출받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그런데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투자 압박은 여전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B그룹 관계자는 “지금이 어떤 때인데 기업에 투자하라 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투자 안 하면 손봐주겠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2기 경제팀의 기업소득환류세제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사내유보금의 60~70%를 임금·배당으로 풀고 기준에 못 미치면 과세하겠다는 것인데, 소비진작까지 기업이 떠맡아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해야 할 일 떠넘겨”
기업들이 떠안은 고용창출 부담도 크다.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고용률 70% 달성’을 위해 지난해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 이에 맞춰 지난해 11월 민관 합동 채용박람회에선 삼성 6000명, 롯데 1944명 등 10개 대기업이 1만865명의 시간선택제 직원을 뽑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자동차와 포스코 등 다른 그룹도 뒤늦게 시간선택제 채용 계획을 내놨다.그러나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은 지지부진하다. 정부 압박에 당초 계획에 없던 신규채용 계획을 내놨지만, 뽑은 뒤 배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채용을 주저하고 있다는 게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대기업들은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 예산은 물론 산업부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산업혁신 3.0’ 예산도 부담한다. 산업혁신 3.0은 대기업들이 2, 3차 중소협력사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7년까지 여기에 드는 예산은 2135억원으로 삼성(650억원), 현대차(500억원), 포스코(250억원) 등 대·중견기업들로부터 갹출한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경기부양, 내수진작, 고용창출 등은 정부가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최근 상황만 보면 이런 역할을 기업의 자발적 협조 없이 과도하게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태명/남윤선/심성미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