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사문화된 청소기 흡입력 기준

남윤선 산업부 기자 inklings@hankyung.com
‘헷갈리는 청소기 흡입력 기준’을 지적한 본지 기사(9월2일자 A38면)를 접한 많은 독자들에게서 “가려운 데를 잘 긁어줬다”는 격려를 받았다. 기사는 청소기의 주요 성능인 ‘흡입력’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어 소비자들이 제품을 고르는 데 불편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독자는 “마트에서 종업원과 어떤 제품이 좋은지를 놓고 실랑이한 적이 있었다”며 “하루빨리 분명한 표준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반면 담당부서인 기술표준원은 즉각 항의를 했다. 흡입력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박 자료까지 냈다. 알고 보니 표준이 정말 있기는 있었다. 전기 진공청소기에 대한 품질 관련 규정(KS C 9101)에는 청소기의 흡입력에 대한 ‘흡입 입률 측정 방법’이 있으며, 청소기 외곽의 보기 쉬운 곳에 흡입 입률을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문제는 국내 출시된 거의 대부분의 청소기가 이 표시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업체들은 이런 규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사정은 이렇다. KS는 품질에 대한 인증이다. KS가 붙으면 ‘품질이 좋다’는 일종의 증명이 된다. 품질 인증이다 보니 강제 사항은 아니다. 품질 인증을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된다. 과거에는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KS를 붙이려고 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미 글로벌 기업이 됐고 세계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는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굳이 KS 인증을 받을 이유가 없다. 다이슨 등 외산 업체들은 더더욱 그렇다. 인증 과정에서 비용만 발생할 뿐이다.

그렇다 보니 청소기 흡입력 관련 규정도 자연스레 사문화됐던 것이다. 안전과 관련된 KC 인증은 업체들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KC 인증은 청소기 흡입력을 표시하도록 강제하고 있지 않다.결과적으로 업체들은 청소기에 흡입력을 표시할 이유가 없다. 흡입력은 ‘성능’이기 때문에 성능 인증에만 포함시켰고, 강제할 수 없다는 논리는 소비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에 불과하다. 청소기 관련 규정 담당자가 실제 청소기를 몇 개만 봤어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남윤선 산업부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