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외교관 그만두고 우동집 창업, 신상목 기리야마 본진 대표

"외교관 관둔 것 후회요?
매일 피말리는 전쟁이지만 우동 파는 지금이 행복해요"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우동 하면 보통 고속도로 휴게소, 또는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먹는 저렴한 음식을 떠올린다. 그런데 “우동은 예술”이라며 심상찮은 품격을 입힌 식당이 있다. 여기 우동을 후루룩 먹어보면 수제 면발의 비범함이 느껴진다. 국물은 깔끔하고 개운하다. 초밥은 눈 녹듯 입에 감기는 맛이 일품이다. 서울 강남역 역삼세무서 근처 ‘기리야마 본진’이다. 이 식당 신상목 대표(44)의 이력은 특이하다. 최고 엘리트로 통하는 외교관 출신이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나름대로 잘 나갔다. 하얀 피부, 안경 쓴 멀쑥한 외모. 누가 봐도 고차원 화이트칼라다.

그런데 외교관 생활을 갑자기 그만두고 지금은 우동과 초밥을 팔고 있다. 동료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고, 아내로부터는 이혼당할 뻔했고, 한때 딸하고는 거의 말을 섞지 못했다. “후회한 적 없느냐”고 물었다. “만감이 교차하죠. 하지만 지금이 행복해요. 생활이 좀 불안하긴 해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밥 먹여주는 게 아니니까 빨리 돈을 좀 벌어야….”(웃음) 신 대표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10분 지각 덕에 ‘구사일생’
파키스탄 식당에서 폭탄테러
간발의 차이로 목숨 건진 후 “하고 싶은 일 하자” 창업 결심

동료들 ‘미쳤다’고 수군
아내·딸 반대로 이혼할 뻔…이젠 ‘아빠의 선택’ 이해해줘

도쿄 근무시절 우동집 인연
3代 이어온 우동 맛에 반하고 세월 지나도 변함없음에 감동
4년간 기술 전수 받으며 준비자영업 어려움·즐거움 ‘교차’
‘세월호’ 이후 매출 급감했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재미 있어
‘가장 한국적인 식당’ 逆수출 꿈

자영업의 쓴맛

신 대표는 2012년 10월 식당을 열었다.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오다 올해 세월호 참사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학 교과서가 아닌 ‘밑바닥 실물경제’의 냉혹한 현실을 알았다고 했다. “창업 이래 이런 적이 없었어요. 5월이 보통 대목인데 작년보다 30% 이상 매출이 빠지고, 6월은 더 심했어요. 그나마 7월 들어 조금씩 나아지려니까 휴가철이 시작돼 또 비수기고. 의지하고 상관없는 사회적 이벤트로 이렇게 타격을 받을 줄 몰랐죠. 자영업하는 모든 분은 매일 피말리는 전쟁이구나, 절감하고 있습니다. ”식당 내 좌석 수는 96석. 테이블 간격은 강남역 일대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넓다. “공간이 확보돼야 신경 덜 쓰며 얘기하고 편하게 드실 수 있잖아요. 다닥다닥 붙어서 식사가 되겠습니까. 그런 훈련은 외교부에서 G20, 핵안보정상회의 관련 일을 하면서 많이 된 것 같아요. 각국 ‘정상’들을 편하게 모셔야 하는 행사였으니까.”

속아서 간 연세대 법대

신 대표는 연세대 법대 89학번이다. 진학 동기가 재미있다. 어려서부터 비즈니스든 외교든 ‘국제적’인 것이 하고 싶어 어린 마음에 정치외교학과 또는 어문계열 학과에 가고 싶었다. 진학 상담 때 이렇게 말하니 고교(휘문고) 담임선생님이 진지하게 말했다. “상목아. 네가 원하는 걸 하려면 그쪽 말고 법대를 가야 한다. 법대를 가면 훨씬 더 넓게 배울 수 있고 법관도, 외교관도 될 수 있다.” 그런데 법대를 가서 보니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사법시험 준비하는 곳이었어요. 1학년 때부터 강의 시작 10분 전 문 앞에서 앞자리 잡으려고 학생들이 줄 서고.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선생님이 법대를 못 가서 한 맺힌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이곳에서 그는 항상 버팀목이 돼주는 아내를 만났다. 한때 그렇게 자신을 미워했던 딸도 이제 ‘아빠의 선택’을 조금씩 이해해준다며 고마워했다.기리야마와 운명적 만남

준비한 지 3년 만인 1996년 제30회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2000년 일본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대학원 연수를 갔을 때 그의 운명을 뒤흔든 ‘기리야마’와 처음 만났다. 도쿄 시내에서 두 시간여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 기리야마 가문이 3대째 100여년에 걸쳐 해온 곳. “우연히 갔는데 우동, 소바가 참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주인 할아버지(기리야마 구니히코)에게 정말 맛있다고 하니까 만면에 미소를 띠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식당 주인은 역시 음식 맛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기뻐요.” 그러고 보니 기자가 “우동 정말 맛있다”고 하니 신 대표도 참 밝게 웃으며 좋아했다.

신 대표가 기리야마를 다시 찾은 것은 4년 뒤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2006년이다. “쇼크를 받았어요. 6년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분위기, 사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 이런 게 힘들잖아요. 우리나라 외형적으로 보면 선진국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삶의 질은 전혀 아니잖아요. 참고 기다리는 마음, 여유와 배려가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가 될 텐데…. 기다림의 미학이랄까, 그런 감성을 한국에도 소개했으면 하는, 굉장히 막연한 동경을 그때 품었어요.”

인생무상, 하고 싶은 걸 하자

‘똑같은 식당을 차려보자’ 자나 깨나 생각이 들었지만 신분상 어림도 없는 얘기. 혼자 끙끙 앓기까지 했다. 동경이 구체화된 것은 2008년 파키스탄대사관에 부임해서다. 부임한 지 한 달째인 9월20일, 수도 이슬라마바드 메리어트호텔에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예약 시간보다 10여분 늦게 도착했는데 도착 직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정문에서 폭탄이 터졌다. 식당을 포함한 1층 전체가 초토화됐다. 50여명이 죽고 250여명이 다쳤다. “호텔이 공항처럼 돼 있어 1층 식당 앞 바리케이드에서 줄을 서서 보안검색을 했어요. 제 시간에 갔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사고 난 다음 그래도 직업 본능이 있어서인지 빨리 상황 파악하고 교민들 안위 확인하고 서울에 보고하고 방송 인터뷰하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다음 의자에 걸터앉아 당시 체코 대사 등 사망자 명단을 보는데 ‘원래 내가 이 사망자 명단에 있을 뻔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다행이라는 느낌이 아니고, 엉뚱한 생각이 스치는 거예요. 내일 일도 기약할 수 없는데 뭘 그리 주저하고 망설이고 살아야 하나. 그때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기리야마 할아버지에게 자필 편지를 썼어요. 기리야마 식당을 한국에서 해보겠다고.” 기리야마 할아버지는 망설임 끝에 ‘신군의 진심을 알겠다.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는 답장을 줬다. 그는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의전기획과장을 끝으로 외교부에 사표를 냈다.

장인정신의 7할은 정성

사표를 내기 전 4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다. 지인 2명을 기리야마 할아버지 밑에서 ‘스미코미(숙식하며 배우는 견습 직원)’ 생활을 하게 하면서 기술을 하나하나 전수받았다. 우동 뽑는 방법에는 무슨 비결이 있을까. “영업비밀이고….(웃음) 정성이 중요합니다. 음식은 지역이 바뀌면 반드시 미세 조정을 해줘야 해요. 재료, 습도, 기온 등 모든 조건이 다르니까. 포뮬러(공식) 익히는 게 음식 완성의 30%라면 일관된 맛을 내기 위해 정성 들여 희생하는 게 70%입니다. 이게 바로 장인정신입니다.” 인테리어, 식탁 등은 모두 신 대표가 고르고 골라 완성했다. “공무원이라는 큰 조직에서는 휩쓸려 가는 거죠. 그런데 이 식당은 제 거니까, 머릿속에 있는 게 바로 현실이 되는 게 참 재밌어요. 식당 주인이 되면 잘 먹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남들 먹을 때 못 먹고 거지같이 대충 끼니 때우고.”(웃음)

그의 목표는 기리야마 본진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뒤 2, 3호점 등 후속 점포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관학교’ 운영하는 심정으로 직원도 10여명 두고 있다고 한다. 1차 목표가 달성되면 역으로 ‘가장 한국적인 식당’을 만들어 일본에 진출하는 게 꿈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관 출신인데 일본 걸 한국에 소개하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죠.”

“외교관 시절 한국기업 위대함 느껴…개도국 근무가 더 보람”

외교관의 해외 공관 업무는 비정형적이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공관에서 업무를 보지만 국내 또는 현지 공무원, 기업인 등을 만나느라 돌아다닐 때도 많다. 대사관 직급은 서기관→참사관→공사→대사 순으로 올라간다. 대사관은 대통령 특명전권을 받아 국가를 대표하고 하부 조직인 총영사관과 함께 자국민 보호, 경제교류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신상목 기리야마 본진 대표는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 공관에서 외교관 활동 범위가 훨씬 넓고 그만큼 보람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주(駐)파키스탄대사관에서 일할 때 기억이다. 현지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두산중공업이 2009년 서울에서 못쓰게 된 구식 컴퓨터 200여대를 파키스탄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세관은 “웃기는 소리”라며 높은 세율의 관세를 물리려고 했다. 부패가 만연한 나라이기에 해외 기업의 무료 기증 자체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산은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신 대표는 항구 세관이 있는 카라치와 2000여㎞ 떨어진 관세청을 오가며 현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관세 0원으로 기증품을 무사히 들여올 수 있었지만, 이 과정만 1년이 걸렸다.

그는 외교관으로 지내며 국내 기업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했다. 가장 인상 깊은 기업으로 삼부토건을 꼽았다. “유럽 일본 미국 모든 선진국 기업들이 손사래치던 해발 2000m 이상 터널공사(로아리 터널)를 따내 잘 마무리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의 불가사의한 힘을 파키스탄 사람들이 좋게 봐요.”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창업을 결심하는 데 이런 한국 기업의 힘도 컸다고 했다.

■ 신상목 대표▷1970년 서울 출생
▷휘문고, 연세대 법학과 졸업
▷1996년 제30회 외무고시 합격
▷2006년 주일대사관 서기관
▷2008년 주(駐)파키스탄대사관 참사관
▷2010년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행사기획과장
▷2011년 핵안보정상회의 의전기획과장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