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벤처 거품' 닮아가는 사모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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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증권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국내 사모펀드는 못 믿겠어요.” ‘토종’ 사모펀드 시장에 자금줄 역할을 해 온 대형 연기금 최고운용책임자(CIO)의 말이다. 그는 “해외 사모펀드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사모투자전문회사 제도가 도입된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무엇이 투자자와 운용사 간에 불신의 벽을 쌓게 만들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몇몇 사모펀드의 투자 실패다. 에스콰이어처럼 투자했던 회사가 법정관리로 넘어가거나, 보고펀드의 LG실트론 투자와 같이 이자를 못 갚아 사모펀드가 부도가 나는 사례도 발생했다. 국민연금은 사모펀드가 일정 기간 동안 투자하지 않으면 수수료를 주지 않겠다고까지 최근 선언했다. 빠른 투자 회수라는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다. 아예 정책금융공사 등은 올해 사모펀드 투자를 건너뛰기로 했다.전문가들은 사모펀드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투자 수익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수수료만 따먹으려 한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온 사모펀드들이 변해야 한다는 것. 자금을 대는 연기금 등 큰손(LP)들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부분 순환근무제로 인해 직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 이들은 장기 투자해 성과를 올리는 사모펀드의 속성을 무시하고 빠른 수익 회수를 강요하기 일쑤다.
사모펀드 설립이 허용된 직후인 2005년에 수천억원 규모의 사모펀드가 조성되자 출자자가 정한 투자소진율 조건에 맞추기 위해 운용사들이 면밀한 검토없이 투자에 나선 게 ‘참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최근 사모펀드 시장에서 과거 ‘벤처 거품’처럼 일순간에 시장에 대혼란이 일어날 가능성마저 나온다. 신뢰 상실, 투자 실패의 악순환, 운용사의 자금난이 뒤엉킬 수 있어서다.정부가 토종 사모펀드를 키우기로 한 데는 외국계 사모펀드에 유린당했던 외환위기 때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사모펀드 운용사와 출자기관 모두 자신만의 이익을 고집하지 말고 시장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박동휘 증권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