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예술과 낭만의 거리' 수성동 길…2년새 이색카페·음식점 3배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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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나들이객 '북적'…서울 도심의 숨겨진 보석같은 마을개천절 연휴 첫날인 3일 오후 2시 인왕산 자락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주택가. 4, 5층짜리 빌라 건물 사이로 난 폭 6~7m 넓이의 언덕길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와 연인,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중년 여성까지 가을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로 붐볐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자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옥인시범아파트 흔적’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몇 년 전까지 이곳에 9개동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했다.수성동 계곡 공원에서 아래쪽으로 약 5분을 걸어 도착한 박노수미술관에는 관람객들이 미술관 밖까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동네 곳곳에 있는 카페와 음식점, 갤러리, 잡화점 등도 나들이객들로 북적거렸다. 일본인 여행객 야스코 우치모리 씨(30)는 “그동안 명동 동대문 이태원 같은 곳에만 들렀는데, 서울 도심 가까이 이런 보석 같은 마을이 있다고 해서 와 보니 볼거리와 먹거리가 다양해 좋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인왕제색도’ 소재였던 수성동 계곡길이 예술과 낭만의 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계곡 위 인왕산 자락에 있던 옥인아파트가 2009년 철거되면서 1000명의 주민이 빠져 나가 마을 공동체와 상권 쇠락을 걱정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수성동 계곡길이 있는 옥인동 내 음식점 수는 2012년 9개에서 현재 26개로, 커피숍은 3개에서 9개로 크게 늘었다.
◆옥인아파트 헐고 계곡 복원수성동 계곡이 있는 옥인동을 비롯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는 경복궁 서쪽에 있어 조선시대부터 ‘서촌’으로 불렸다. 사대부 계층의 거주지였던 북촌과 달리 서촌은 예로부터 예술인들의 터전이었다. 진경산수화 개척자인 겸재 정선과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가 서촌에 살았다. 20세기 들어서도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같은 화가들과 윤동주 이상 등 시인들이 서촌을 기반으로 예술활동을 했다.
옥인동 주택가가 확 달라지기 시작한 계기는 2012년 7월 끝난 수성동 계곡 복원이다. 그 전엔 인왕산과 수성동 계곡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1971년 들어선 옥인아파트 때문이었다.서울시와 종로구는 인왕산 경치와 생태계 복원을 위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2120억원의 예산을 들여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수성동 계곡을 복원했다. 인왕제색도에 나온 풍경을 참고하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돌다리를 다시 세우고, 암석으로 계곡을 꾸몄다. 계곡 주변엔 소나무와 산철쭉 1만8000그루도 심어 옛 모습을 재현했다.
2013년 개관한 박노수미술관도 이 동네 상권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양화가 고 박노수 화백이 1970년대부터 살던 자택을 기증받은 종로구는 작년 9월 그가 남긴 작품 1000여점으로 구립미술관을 개관했다. 지난 1년간 13만4000여명이 다녀갔다.
◆공방과 갤러리 잇따라 생겨
수성동 계곡길 곳곳엔 10여개 공방이 자리잡고 있다. 작업실과 판매점을 한 곳에 둘 수 있으면서도 서울 도심에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싸 삼청동 이태원 등에 터를 잡았던 공예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재활용품을 이용해 만든 선인장 화분 등을 판매하는 ‘구상의 집’을 개장한 정세진 대표는 “이태원 쪽에서 장사를 했는데, 상권이 뜨면서 우리 같은 공방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올랐다”며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싼 이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옥을 개조한 갤러리 서촌재를 운영 중인 김남진 대표는 “갤러리 관람객이 많아져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는 가게를 지난 8월에 또 하나 차렸다”고 말했다. 이 밖에 한지공예 작업실 서촌마루와 가죽공예 작업실 애니하우스 등도 찾는 사람이 많은 공방들이다.
젊은 작가의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갤러리들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박노수미술관 인근의 갤러리 아티온이 대표적이다. 아티온 옆 주차장에서는 지난 4월부터 주말마다 10여명의 젊은 예술인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판매하고, 나들이객의 캐리커처를 엽서에 그려 주는 ‘서촌 예술시장’도 열리고 있다.
◆지역 주민들 “시끄럽다” 불만도
이곳 카페와 상점들 상당수는 빌라 1층을 개조한 공간에 들어섰다. 한적한 주택가를 따라 카페들이 생겨나는 모습은 홍대역과 합정역, 상수역 상권의 초창기와 비슷하다. 지난 7월 빌라 1층에 카페 ‘잭 앤 베어’를 개업한 최재희 사장은 “홍대 뒷길과 합정역 인근 같은 주택가가 큰 상권으로 발전하는 걸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이곳에 가게를 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전했다.이곳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주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박정식 씨(67)는 “이 지역은 원래부터 주차공간이 부족했는데 요즘은 주차난이 더 심해졌다”며 “밤 늦게까지 술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조용하던 동네가 소란스러워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설재우 옥인상점 대표를 중심으로 한 상인 20여명은 1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수성동 계곡 공원과 마을을 대청소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