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담합 잡는' 리니언시 '녹슨 칼' 되나

생보사 자진신고에도…법원 "담합 아니다" 잇단 판결

공정위 과징금 부과 70~80% 리니언시 의존
향후 담합조사 '걸림돌' 예고
담합 인정한 생보 '빅3', 과징금 날리고 업계 '눈총'
공정거래위원회가 리니언시(자신신고자 감면제도)를 통해 보험사들의 담합을 적발하고 부과한 과징금에 대해 법원이 잇따라 취소 결정을 내렸다. 일부 보험사의 ‘담합 자수’는 과징금을 회피하기 위한 차원일 수 있어 담합의 증거로 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은 또 금융감독원의 행정지도를 받아 행한 상호업무협의를 담합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공정위가 적발하는 담합의 80%에는 리니언시가 적용된다.
○대법, 과징금 3630억 취소결정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31일 신한생명 ING생명 알리안츠생명이 ‘담합 과징금 부과가 부당하다’며 공정위를 상대로 제기한 취소 소송에서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공정위는 ‘이들 회사를 포함한 9개 보험사가 변액보험 수수료를 담합했다’며 총 204억원의 과징금을 물렸다. 당시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은 담합을 자진신고하고 조사에 협조해 과징금을 각각 100%(76억원)와 50%(36억원) 감면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생보사들은 ‘금융감독원의 행정지도에 따른 업무협조로 담합은 없었다’며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정보교환 행위가 있었지만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합의가 아니고, 자진신고 역시 그와 반대되는 진술이 있어 담합 증거로 보기 힘들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상당한 수준의 수수료 일치가 있었다’는 공정위 주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행정지도를 통해 보험료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금감원의 지시로 협의체를 만들고, 큰 보험사가 정한 수수료율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앞서 대법원도 지난 7월 공정위가 16개 보험사에 개인보험 가격담합을 이유로 물린 3630억원의 과징금 취소를 결정했다. 당시에도 교보생명과 삼성생명의 자진신고가 있었지만, 대법원은 보험에 적용하는 이자율을 담합했다는 공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후유증에 시달리는 보험업계

잇따른 소송 결과는 보험업계에 큰 후폭풍을 남기고 있다. 특히 자수한 ‘빅3’ 생보사와 중소형 생보사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과징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섣부르게 담합을 인정하며 혼자 살길을 찾은 데 대해 배신감이 크다”고 말했다. ‘빅3’의 상처는 더 크다. 소송서 이긴 중소형사들은 납부한 과징금을 돌려받지만, 담합을 인정한 회사들은 과징금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징금을 상당 부분 감면받았지만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의 두 건 관련 과징금은 각각 473억원과 36억원에 이른다. 일부 회사에서는 리니언시 참여를 결정한 후 미숙한 대처를 빌미로 인사조치된 직원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리니언시 위축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보험업계 고위 관계자는 “조사 소식이 들리면 진실 여부에 대한 판단과 무관하게 과징금을 덜 맞기 위해 자수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공정위가 압박해도 섣불리 리니언시를 결정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사건의 경우 리니언시에 대한 의존이 큰데 자진 신고자의 진술만으로는 신빙성이 약하다고 보는 듯해 당혹스럽다”며 “제도 개선을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지도를 따랐을 뿐이라는 보험사들의 주장을 인정한 점도 어느 정도를 합의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에 혼란을 주는 판결”이라고 덧붙였다.

■ 리니언시(leniency)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 담합했다는 사실을 먼저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주는 제도다. 불공정행위에 대한 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고 담합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됐다. 담합을 처음 신고하면 과징금의 100%를, 2순위로 하면 50%를 각각 면제해준다.

백광엽/마지혜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