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좌충우돌 네쌍둥이 키워보니, 간절함 있으면 다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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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다란성 네쌍둥이 키운 손기용 신한은행 대전충남본부장“여보, 하나가 아니래.”
다섯 자녀 양육 위한 사투…아이들 식사 챙겨주기 힘들어
밥 말거나 비벼 숟가락만 쥐여줘…놀이터선 500원 선물 놓고 경쟁 붙여
몸에 밴 절약정신으로 교육…학원비는 네쌍둥이로 50% 할인 협상
학자금 지원해달라 은행장 찾아가기도…아이들만큼 든든한 보험 없어요
“그럼 쌍둥이래?”“우선 병원부터 와봐.”
손기용 신한은행 대전충남본부장(54)은 1989년 여름을 잊을 수 없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3개월밖에 안 됐는데도 배가 급속도로 불러온 것을 이상하게 여겨 병원에 간 터에 걸려온 전화였다. 병원으로 달려간 손 본부장은 그 자리에서 네 쌍둥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앞으로 나갈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 걱정에 까마득해졌다. 그 해 11월29일 네 쌍둥이가 태어났다.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예정일보다 두 달 가까이 일찍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네 명 모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인큐베이터 수가 모자라 둘은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둘은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큰딸을 돌보면서 병원 두 곳을 수시로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 아이는 국내 최초의 다란성(多卵性) 쌍둥이로 성별과 생김새 성격 몸무게 등이 전부 달라 화제가 됐다. 이 때문에 아기용품 분유회사 기저귀회사 등에서 광고 제의가 들어왔지만 손 본부장은 모두 거절했다. 아이들 얼굴이 알려져 생활하는 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것이 걱정돼서다.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 손 본부장 혼자 나온 것 또한 무엇보다 자녀들의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손 본부장은 “다섯 자녀 양육을 위한 사투(?)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아이들 용돈 지급부터 훈육 방법, 식습관을 길러주는 것까지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었다. 그의 가정교육 방식은 신한은행 내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말거나, 비비거나
신 본부장의 다섯 자녀는 장성했다. 큰딸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 네 쌍둥이도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딸과 두 아들은 취직했고, 나머지 아들은 아직 군 복무 중이다.다섯 자녀 모두 든든하게 자랐지만 이들을 키울 때 부모가 한 고생은 말로 다하기 힘들다. 식사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다섯 자녀가 모두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누가 누구를 챙겨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말거나, 비비거나’이다. 큰 대접에 국을 붓고 밥을 말거나, 나물과 된장 등을 비벼 놓고 아이들에게 숟가락만 쥐여주는 것이다. 부모가 먹여 주는 일은 없다. 밥만 있으면 먹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귤 한 상자를 사 와도 다음날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허다했다. 배가 불러도 먹어놓고 보자는 게 다섯 아이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남는 귤은 각자의 비밀공간에 숨겨뒀다. “그때 아이들이 어디에 귤을 숨겼는지 아직 모릅니다”며 손 본부장이 웃었다.
“그래서인지 다섯 아이 모두 늦잠 자는 일이 없었어요. 늦게 일어나면 밥이 없었거든요. 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나머지 애들이 다 먹어버리기 때문이죠.”500원으로 가르친 ‘적자생존’법
자녀가 많은 부모의 대표적 고민은 경제적인 문제다. 한 사람당 투입액이 적을 수밖에 없어 아무래도 한두 명을 키울 때보다 교육 등에 소홀히 하게 된다. 손 본부장은 ‘적자생존’법을 택했다. 부모가 일일이 신경 써 주지 못하는 대신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을 가르쳐야겠다는 취지였다.
그가 자주 쓴 방법은 ‘500원 전략’이었다. 휴일에 다섯 자녀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 무조건 경쟁을 붙였다. 가령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를 하면 가장 오래 버틴 아이에게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두 번째로 버틴 자녀에겐 400원짜리를 사줬다. 가장 빨리 떨어진 아이는 100원짜리에 만족해야 했다. 여자라고 봐주는 법도 없었다. 축구를 해도 내기를 했다.
“둘째 딸이 입사 전에 쓴 이력서를 슬쩍 봤더니 특기에 축구를 적었더라고요. 한참 웃었습니다. 걔가 진짜 남동생들이랑 같이 크면서 축구를 잘했거든요.”
적자생존의 1원칙이 경쟁이었다면, 2원칙은 자율이었다. 다섯 아이의 용돈은 모두 합쳐 한 달에 20만원이었다. 빳빳한 1000원짜리 신권을 200장을 둔 뒤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되 용처를 노트에 적게 했다. 결산은 은행 영업점에서 마감 시간에 시재(지점이 보유한 현금)를 맞추듯 철저하게 했다.
하루는 1000원이 비었다. 장부와 남은 돈이 맞지 않았다. 손 본부장은 범인 색출에 들어갔다. 자수할 때까지 매를 들었다. 손 본부장은 그날 잡힌 범인을 데리고 파출소까지 끌고 갔다. 나머지 아이 넷이 울면서 따라왔다. “온 동네 사람이 구경 나올 정도로 시끌벅적했죠. 하지만 자율을 준 만큼 정직하게 키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어긋나면 정말 무섭게 혼냈습니다.”
“간절하게 찾다 보니 방법이 생기더군요”
생활비와 교육비도 만만찮았다. 네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인큐베이터에 쓴 비용만 2000만원이었다. 1989년 서울의 99㎡짜리 아파트 가격이 대략 4500만원이었다. 의료보험도 자녀 2명까지만 받을 수 있었다. 손 본부장은 당시 보건사회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넷을 낳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둘째를 낳으려다 네 쌍둥이가 나왔을 뿐이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결국 다섯 자녀 모두 의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보건사회부의 유권해석을 들고 은행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신한은행도 둘째까지만 학자금을 지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 은행장도 설득당해 사규를 고친 뒤 다섯 아이 모두에게 학자금을 지원했다.
학원비가 들어갈 일이 생길 때는 무조건 ‘50% 할인’ 원칙을 들이밀었다. 학원 원장에게 전화해 다섯 자녀 양육의 애로사항을 호소하며 할인을 부탁했다. 이후에 학원을 옮겨 다닐 때는 네 쌍둥이가 직접 학원과 협상에 나섰다.
아이들과의 첫 해외여행지는 중국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가 중국을 휩쓸고 간 뒤 여행사 상품가격이 떨어진 때를 이용했다. 1인당 3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놀이공원에 갈 때면 종일권을 세 장만 끊었다. 아이들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놀이공원에 들여보내는 방법이었다.
“절박하게, 또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으로 애쓰면 방법은 나오게 돼 있습니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뭐든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든든한 보험
다행히 자녀들이 손 본부장의 교육관을 잘 받아들였다. 네 쌍둥이 중 두 명이 재수할 때는 자발적으로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한 명은 하루에 800원만 내면 종일 이용할 수 있는 우면산 근처 도서관에서, 다른 한 명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남산도서관에서 공부해 대학에 입학했다. 쌍둥이 아들 셋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학군단(ROTC)을 지원하고 병역을 마쳤다.
손 본부장은 “키울 때는 고생이 많았지만 아이들만큼 든든한 보험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모두 바르게 키웠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아이들은 손 본부장에게 매달 50만원씩 내고 있다. 다섯 명이니 총 250만원이다. 손 본부장은 애들이 고등학교 때쯤 확약서를 받았다. 다달이 50만원씩 내고,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조금씩 올려야 한다는 내용도 넣었다. “다섯 아이 키우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던 만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받은 돈은 애들에게 도움되는 일에 써야죠.”
그는 결혼을 앞둔 큰딸에게 네 쌍둥이 동생들이 돈을 모아서 냉장고를 사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슬쩍 흘렸다. 전쟁처럼 키웠지만 다섯 자녀 모두 우애가 좋다는 자랑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건강하게 잘 지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두 부부만 이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대뽀 정신'이 나의 힘
인사부장에 직접 편지써 입사…10년 구애 끝에 결혼 골인
네 쌍둥이를 포함해 다섯 자녀를 잘 키워낸 손기용 신한은행 대전충남본부장은 남다른 돌파력의 소유자다. 시쳇말로 ‘무대뽀 정신’이 있다.
그는 1985년 한 시중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그는 탐탁지 않았다. 인사적체가 심해 마흔이 넘어야 과장을 달 정도여서다.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던 그는 당시 신생 은행으로 조직이 역동적이었던 신한은행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직은 벽에 부딪혔다. 인사부에서 신한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의 추천서를 요구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었던 그는 무작정 인사부를 찾아갔다. 방법을 물었지만 “은행 경력이 너무 짧아서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신생 은행인 만큼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얘기였다. 당시 손 본부장의 뱅커 경력은 2년이 채 안 됐다.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인사부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왜 입행하고 싶은지와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구구절절 적었다. 첫 번째 편지에 답이 없자,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면접보러 오란 얘기였다. 결국 합격했다.“이런 무대뽀 정신이 다섯 자녀를 키운 저력”이라는 게 그의 자평이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안 될 일이 없다는 신조다. 10년 구애 끝에 초등학교 동창인 부인과 결혼한 것도 남다른 실행력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게 많거든요.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그중 하나지요.”
글=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