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은행들, 美서 '0%대 대출금리' 공격…한국계 은행 '개점휴업'

특파원 리포트

일본계 은행, 엔화자금 조달비용 '사실상 제로'
韓부품기업 등에 '반토막 금리' 내세워 대출 싹쓸이
한국계 은행, 한국기업 대출 점유율 30% 밑으로 추락
‘0%대 금리’로 무장한 일본계 은행들이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대한 대출을 ‘싹쓸이’하고 있다. 일본은행의 대규모 양적 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을 등에 업은 일본계 시중은행이 현지 한국 기업을 타깃으로 공격적 영업에 나서면서 한국계 은행의 미국 지점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미국에서 한국계 은행의 ‘텃밭’을 잠식하고 있는 일본계 은행이 최근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으로까지 영업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계 은행 절반 금리로 ‘공격’
23일 뉴욕의 한국 시중은행 지점에 따르면 최근 현대차 앨라배마공장과 거래하는 협력업체 A사의 5000만달러 매출채권 담보 대출계약을 일본계 미즈호은행이 가져갔다. 한국계 은행이 본점과 협의해 마지노선이라고 제시한 연 1.6% 안팎의 절반인 연 0.8% 대출금리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본과 한국 은행들의 금리 차가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웬만하면 한국 기업은 한국계 은행을 이용했지만 최근 금리 차가 워낙 커 일본계 은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출 연장 건을 일본계 은행이 가로채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기아차 조지아공장에 납품하는 B사는 국내 은행들로부터 신디케이티드론으로 받은 5000만달러의 만기가 돌아오자 만기 연장과 함께 금리 인하를 요청했다. 국내 은행이 검토하는 사이 일본 스미토모미쓰이은행이 기존 대출금리(연 2.0%)의 절반인 연 1.0%에 대출을 떠안겠다고 치고 들어오면서 싱겁게 게임이 끝났다. 농협 뉴욕지점 관계자는 “과거 한국 기업은 쳐다보지도 않던 일본계 은행이 최근엔 단 1bp(0.01%포인트)라도 건질 수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섭게 달려든다”고 말했다. 일본 시중은행이 한국계 은행의 절반 이하 금리에 대출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제로금리로 엔화를 조달할 수 있는 데다 신용등급이 높아 달러를 빌릴 때도 가산금리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신용대출도 마찬가지다. 최근 스미토모미쓰이은행은 필름 메이커인 대기업 S사에 2000만달러의 무담보신용대출을 연 2.5% 조건으로 주기로 했다. 한국계 국책은행보다 1%포인트 이상 낮은 금리 조건이다.

○일본계 은행에 밀려 사실상 영업 중단

일본계 은행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차, LG전자 미국법인 등 사내유보금이 풍부해 대출 수요가 없는 기업에 대해 공격적인 예금 유치에 나서고 있다. 이들 은행이 제시하는 예금금리는 연 1% 이상으로 한국계 은행보다 0.3%포인트 이상 높다. 고객 확보를 위해 일시적인 역마진을 감수하고 예금 유치에 나서는 것이다. 씨티 등 미국계 은행은 기업의 재무관리 대행 등 장기적인 고객화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반면 일본계 은행은 금리 차를 파고들어 훨씬 위협적이라는 게 현지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한국계 은행보다 편리한 일본계 은행들의 대출 절차도 기업에 매력적이다. 한 일본계 은행은 현대·기아차의 매출채권만 있으면 별도 담보나 본사 보증 없이 곧바로 연 0.7%에 자금을 빌려주는 전용대출 상품으로 한국 부품기업을 공략하고 있다. 반면 한국계 은행들은 본사의 보증과 자산담보를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아차 협력업체의 한 관계자는 “일본계 은행의 금리가 훨씬 낮고 절차도 편리한 데다 한국인 매니저를 통해 대출관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계 은행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한국계 은행은 현지 한국 기업에 대한 대출영업을 사실상 중단했다. 한 시중은행 뉴욕지점 관계자는 “기업 자금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면 ‘와봐야 소용 없으니 아예 찾아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도 “기업이 더 이상 한국계 은행을 찾지 않는다”며 “은행들도 ‘문전박대를 당할 바에야 돈 들여 출장을 갈 필요가 있느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한국계 은행의 한국 기업에 대한 대출시장 점유율이 30% 밑으로 떨어졌다”며 “최근엔 일본계 은행이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으로 영업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